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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계좌이체도 되는데요…" 집요해진 거리 모금에 시민들은 냉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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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했어요…”

직장인 이모(29·여)씨는 최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친구와 커피를 마시다가 다소 불편한 일을 겪었다. 아프리카 아이들 사진이 붙은 네모난 종이 박스를 든 한 20대 여성이 이씨 일행에 다가와 모금을 해줄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좋은 일을 해달라”는 상대에게 그는 평소처럼 “죄송한데 현금이 없다”며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려 했다. 하지만 여성은 갑자기 “계좌이체도 된다”면서 한참을 버티고 섰다. 잠시 실랑이가 벌어졌고 그는 결국 호주머니에 있던 천원짜리 지폐 몇장을 꺼내야 했다. 그는 “좋은 일을 하겠다는 것은 얼마든지 좋다”면서도 “그 과정이 조금 불편하게 느껴진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최근 뚝 떨어진 기온에 자연스레 소외된 이웃을 돌아보는 ‘기부의 계절’에 접어들면서 각종 모금 활동이 부쩍 늘고 있다. 하지만 시민들을 상대로 집요하게 돈을 요구하는 경우도 적지 않아 시민들의 반응이 점점 냉담해지고 있다. 취지는 공감하나 이런 식이라면 기부의 본래 의미가 퇴색된다는 것이다.

세계일보

13일 한 온라인 포털에 ‘모금’이란 키워드로 검색해보면 지난 1일부터 이날까지 2주 동안 총 4195건의 기사가 검색된다. 9월, 10월 각각 3113건, 4082건이었던 모금 관련 기사는 지난달 6629건으로 2배가량 많아졌다. 연말이 되면서 전국 각지에서 성금 모금 관련 행사가 그만큼 많아졌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유명인들이 ‘좋은 일’에 발벗고 나서는 시기도 바로 이때다.

하지만 이를 두고 “찜찜하다”는 반응도 적지 않다. 기부를 요구하는 자선단체가 많아진 것도 시민들 불신을 키우고 있다. 서울 광화문 근처에서 일하는 직장인 김모씨는 “어떨 때는 출·퇴근 길에 모금 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2∼3명 연달아 만나기도 한다”며 “제대로 된 단체인지부터 의심부터 가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현금이 없다”며 불편한 상황을 피하려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최근에는 계좌이체까지 언급하며 끈질기게 돈을 요구하는 단체까지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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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만하면 한 번씩 터지는 기부 비리도 시민들의 심리를 꽁꽁 얼어붙게 하고 있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기부 경험이 있다’는 응답자는 2011년 36.4%에서 지난해 26.7%로 뚝 떨어졌다. 지난해 기준 ‘기부를 하지 않는 이유’는 ‘경제적 여력이 없어서’라는 응답이 57.3%로 가장 많았고, ‘기부단체를 신뢰할 수 없다’는 응답은 8.9%로 집계됐다.

특히 올해의 경우 예년에 비해 기부금이 모이는 속도가 눈에 띄게 더뎌졌다. 지하철 역 등에서 기부금을 모금하는 한국구세군 자선냄비 모금액은 12일 기준 15억7900만원에 그쳐 23억6100만원을 모았던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33% 가량 줄었다. 지난달 광화문광장에 설치된 ‘사랑의 온도탑’도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70% 수준으로 급락했다.

한 자선단체 관계자는 “특정 개인이나 단체의 일탈로 생겨난 기부 불신이 완전히 해소되는 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며 “기부단체들이 앞다퉈 투명성 강화 방안을 내놓고 있는 만큼 주변에 온정을 전하는 문화가 다시 생겨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창수 기자 winteroc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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