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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대량주문 미끼로 단가 후려치는 갑에 대항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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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김용우의 갑을전쟁(2)
갑질이 난무하는 사회다. 하지만 법 앞에 권력이 군림할 수 없다. 갑이 을이 될 수도, 을이 갑이 될 수도 있다. 분쟁의 최전선에서 쌓은 내공을 통해 갑질에 대처하는 법(法)을 소개한다. <편집자>


중앙일보

납품단가 후려치기란 부당한 방법으로 통상 지급되는 대가보다 낮은 수준으로 하도급대금을 결정하는 것을 말한다. (내용과 관계 없는 사진)[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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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품단가 후려치기’라는 말, 들어봤을 겁니다. 물건을 공급하는 사람이 판매처에 파는 물건의 가격이 납품단가입니다. 가령 우리가 대형마트에서 사 먹는 1000원짜리 과자를 마트는 이보다 싼 값에 들여오겠지요. 마진을 위해서입니다. 마트가 개당 800원에 사 온다고 한다면 이때 납품단가가 800원인 겁니다. 납품단가 후려치기는 부당한 방법을 통해 공급처가 손해를 볼 정도로 물건을 싸게 들여오는 걸 말합니다.

개당 1만원에 부품을 납품하던 하청업체가 새로 계약을 맺는데 단가를 8000원으로 깎아주거나 아니면 다른 거래처를 알아보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대부분의 하청업체는 이 거래를 끊고 다른 거래처를 구하기 어려운 탓에 울며 겨자 먹기로 수용할 가능성이 큽니다.

줄어든 이익으로 직원 월급도 줘야 하고 공장 임차료나 대출 이자 등을 충당해야 하니 남는 게 없을뿐더러 기술개발에 투자하기도 쉽지 않겠지요. 그러다 기술력이 높은 다른 경쟁업체가 나타나면 도산의 길을 걷게 될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하청업체는 일방적 계약에 힘없이 휘둘리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납품단가 후려치기에 휘둘리는 하청업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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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사는 부품을 남품하는 B사에 시도 때도 없이 단가 인가를 강요했다. 최근엔 다량 발주를 조건으로 내세워 무려 단가를 20%나 인하하는 것을 요구했다. [사진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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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를 하나 들어볼까요. A사는 부품을 납품하는 B사에 시도 때도 없이 단가 인하를 강요했습니다. 앞서 A사가 자기 요구를 따르지 않은 C사와 거래를 끊은 사실을 알고 있던 탓에 거절하기도 힘든 상황이었지요.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심한 요구를 해왔습니다. 다량 발주를 조건으로 내세워 무려 단가를 20% 깎아달라는 겁니다.

망설였지만 오래 거래를 해온 주요 고객인 데다 다른 거래처를 확보하기도 만만치 않아 결국 또 받아들였지요. 힘들어도 박리다매 전략으로 이번 달 실적을 어느 정도 만회할 거라 기대했습니다. 문제는 A사가 약속한 만큼 물량을 발주하지 않으면서 시작됐습니다. 한 번에 40개를 발주한다던 부품은 달랑 2개만, 126개를 주문했던 부품은 14개로 수량이 확 떨어진 겁니다.

대금결제 때 A사는 일방적으로 인하한 대금을 지급했습니다. 고정비는 줄일 수 없는데 매출은 뚝뚝 떨어지고, 애가 타던 B사는 결국 공정거래위원회로 달려갔습니다.

A사도 어려운 모양이었습니다. 공정위 조사에서 A사는 발주량을 변경하는 건 장기적인 거래관계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라며 어쩔 수 없었다고 하소연했습니다. A사의 제품을 납품받는 원청사가 마찬가지로 대량으로 물건을 구매하기로 했다가 갑자기 발주량을 대폭 줄였다는 겁니다. A사는 B사 대표가 자사 직원들에게 끊임없이 금품을 제공하며 부품 단가를 올려왔고 단가를 인하하더라도 여전히 시가보다 높은 수준이라고도 했지요.

공정위의 판단은 어땠을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A사에 ‘부당하게 하도급 대금을 결정하는 행위를 다시 하지 말라’는 시정 명령(공정위 2013. 1. 29. 의결 2011서재2099)을 내렸습니다. B사에 20%로 깎기 전 원래 단가와의 차액까지 지급하라고 했지요. A사는 이에 불복해 소송까지 제기했지만 결국 패소했습니다.

공정위와 법원 모두 B사의 손을 들어주게 된 근거는 무엇이었을까요. 일명 ‘하도급법’에서는 원사업자(위 사례에서는 A사)가 단가를 인하할 목적으로 갑자기 발주량 등 수급사업자(위 사례에서는 B사)와의 거래조건을 바꾸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공정위와 법원은 A사가 이를 어겼다고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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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 제4조 제1항, 제2항 제4호. [제작 유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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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하도급법에선 ‘부당하게 낮은 수준의 하도급 대금을 결정하는 것’을 막고 있는데요. 이전에는 ‘현저하게 낮은 수준의 하도급 대금을 결정하는 것’이라고 표현돼 있었습니다. 그런데 ‘현저하게’라는 말은 너무 엄격하다는 지적에 따라 2013년 5월 개정 때 삭제됐습니다. 물론 대금이 낮다고 무조건 법 위반이라 볼 수 없고 ‘부당해야 한다’는 게 핵심입니다.

부당한 방법이 하도 다양한 탓에 하도급법에서 유형화해놨는데요. 가령 A사가 상생 협력 등의 명목으로 경영적자나 판매가 인하 등의 사정을 B사도 감당하라며 부당하게 대금을 결정하는 경우입니다. 만약 고통 분담 차원에서 양측이 진정한 합의를 거쳤고, 이에 따라 단가를 결정한 거라면 부당하다고 볼 수 없겠지요.

그렇다고 해도 무조건 괜찮은 건 아닙니다. 충분한 협의를 거치지 않는 등 수급사업자의 진정한 의사라고 판단되지 않으면 부당한 방법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갑자기 일률적인 비율로 단가를 인하하는 경우도 부당한 행위에 들어갑니다.

원사업자가 수급사업자에게 다른 유인을 주는 경우는 어떨까요. 가령 80일의 결제 기간을 60일로 줄여 빨리 결제를 해주겠다면서 가격을 깎는다면요. 이 경우도 공정위는 법 위반으로 봅니다. 목적물 수령일로부터 60일 이내에 결제해주는 것은 하도급법에 따른 당연한 법적 의무이기 때문입니다(공정거래위원회 2009. 1. 9. 2008하개1593 결정). 원래 그렇게 하는 게 맞는데 이를 일종의 당근책처럼 제시해 단가를 깎으면 안 된다는 얘기겠지요.

그렇다면 억울함을 호소한 A사의 사정은 왜 전혀 반영이 안 된 걸까요. A사는 ‘흔히 발생하는 거래관계라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는데요. 법원은 그랬다면 A사가 ‘특별히’ 많이 사주겠다는 이유를 들면서 단가인하를 요구하지 않았을 것 아니냐고 반문했습니다. 흔한 상황이라면 늘 그랬던 대로 깎아 달라 하지 대량 발주라는 전제를 달지 않았을 거란 얘기입니다.

‘완성품을 납품받는 원청사가 예기치 않게 발주량을 축소해 부득이하게 부품 수량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은 어떨까요. 법원은 그 말이 맞는다면 A사도 원청사에 항의하는 게 자연스럽다고 되묻습니다. 대금을 더 달라고 적극적으로 요구하고 차액을 받은 뒤에 B사에 주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하도급 관계 법적 구제, ‘밥줄’ 각오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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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사는 두 회사가 합의로 단가를 조정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진정한' 합의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A사는 시정 명령을 받고 B사에게 돈을 돌려줘야 했지만 머지않아 B사의 밥줄이 끊기지 않을까 우려된다.[사진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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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사는 두 회사가 합의로 단가를 조정한 것이라고도 주장했지만 법원은 ‘진정한’ 합의가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실제 A사 직원이 B사에 단가인하를 요구하며 보낸 이메일에는 “네고단가를 하기와 같이 결정하오니 검토 후 재견적 부탁드립니다”라고 적혀 있는데요, ‘결정’이라는 단어가 문제 된 겁니다. 형식적으로는 합의가 있었을지언정 A사가 일방적으로 대금을 인하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는 얘기이지요.

인하한 단가가 여전히 시가보다 더 높다는 A사의 주장에 대해선 그 말이 사실이라면 A사가 진작 B사에 단가가 고액이라는 이유로 인하를 요구했어야 한다고 법원은 봤습니다. A사가 제출한 시가 자료에 B사의 일부 부품가가 시가보다 낮은 경우도 있었다고 하고요.

결국 A사는 시정 명령도 받고 B사에 돈도 돌려줘야 했습니다. 하지만 머지않아 B사의 밥줄이 끊기지 않았을까 우려됩니다. 하도급 관계로 법적 구제를 받으려면 적어도 그 정도는 각오해야 하는 현실이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보면 ‘A사도 원청사에 항의해 B사 돈을 받아줘야 한다’는 법원 판단이 현실적인지 다소 의문입니다. A사 역시 원청사 관계에서는 열악한 ‘을의 지위’에 있기 때문이지요. A사 입장에서도 원청사에 돈을 돌려달라고 주장하는 게 쉽지 않았을 거란 얘기입니다.

김용우 법무법인(유한) 바른 변호사 yongwoo.kim@barunlaw.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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