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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ESC] 옥상 창업이 바꾼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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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민의 탐정놀이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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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을 시작한 이후로 나는 늘 인복이 좋은 편이었다고 생각한다. 지난 십여 년 동안 자질이든 성정이든 어느 모로 봐도 나보다 뛰어난 사람들과 함께 책을 만들었다. 다만 딱 한 번 골칫덩어리 직원을 만난 적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내가 운영하는 출판사가 강남오피스플라자 건물에 입주해 있을 당시의 일이다. 직원의 이름은 편의상 ‘솔미’라고 해두자. 나이는 23살이었다. 내가 처음 면접을 볼 때만 해도 솔미씨는 파이팅이 있어서 좋았다. 표현력이 풍부하고 성격도 밝아서 편집이나 영업 모두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다소 혀 짧은 소리를 내며 아이처럼 말하는 게 신경이 쓰였지만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단계니까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리라 여겼다. 무엇보다 오랫동안 유도로 몸을 단련해 왔다는 자기소개서를 보고 체력 하나는 믿을 만하겠구나 싶어서 신입사원으로 채용을 결정했다.

왜 체력이 중요했느냐면 사업 초기에 출판사는 야근이 많았기 때문이다. 주 5일 근무는 어림없는 얘기였고 주말에도 서점에서 보내 온 팩스를 확인하느라 출근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솔미씨는 입사 첫날부터 한 시간이나 지각하고 회사에 나타났다. 출근시각을 착각했다고 한다. 뭐 그럴 수도 있지. 그 뒤로도 근태가 엉망이었지만, 나는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때 알아차렸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내가 업무를 지시해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일단 열심히 메모는 한다. 하지만 그 메모를 늘 잃어버렸다. 정신이 없는 타입이라고 할까. 나를 “삼촌”이나 “아저씨”라고 부를 때도 있었다. 무언가에 집중하지 못하고 항상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둘러보거나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일도 잦았다. 인터넷으로 검색을 시작하면 그대로 몇 시간이고 들러붙어 있기도 했다. 주의력이 산만한 것 같았는데 또 이런저런 사이트를 뒤질 때는 대단한 집중력을 보였다. 업무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이트였다는 게 문제였지만.

기대주 신입사원 솔미씨
근태 엉망·주의력 산만 등 무능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서점에서 진행하는 신간 소개 행사 때 필요한 비품을 사러 나갔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질 않는 거다. 무슨 사고라도 났나 싶어서 걱정하다가 전 직원이 출동했지만, 찾지 못했다. 그런데 한참 후에 돌아온 솔미씨를 추궁해 보니, 이 건물의 수위 할아버지와 계단에 앉아서 수다를 떠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고 한다. 그뿐이랴. 회의 시간에 솔미씨는 의욕에 넘쳤지만 그녀가 제출하는 기획서는 모조리 어처구니없는 내용이었다. 컬래버레이션 기획으로 미야베 미유키 작가와 진산 작가에게 무협소설을 각각 의뢰하여 두 사람을 만나게 한 다음 진짜 칼을 들고 복싱 타이틀매치처럼 겨루기 하는 사진을 찍어 표지에 싣자는 둥 예산도 실현 가능성도 깡그리 무시한 아이디어뿐이었다. 아무리 퇴짜를 놔도 이내 또 바보 같은 기획서를 들고 오는 뻔뻔함에는 두 손 두 발 다 들어야 할 지경이었다. 결국 “가뜩이나 책도 안 팔리는데 이렇게 회사에 도움 안 되는 일만 벌일 거면 당장 때려치워”라는 나의 모진 말에 솔미씨는 사표를 내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로부터 일 년 후. 나는 어느 날 출근하는 길에 엘리베이터에서 솔미씨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녀가 헤헤 웃으면서 “사장님, 잘 지내셨냐”고 넉살 좋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회사를 떠난 그날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어린아이 같은 말투는 여전했다. 내가 그만두게 한 직원과 갑자기 맞닥뜨린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여기서 뭐 하느냐고 물었더니, 솔미씨가 여전히 해실거리며 말했다. “오늘부터 이 건물에서 일하게 됐어요”라고. 정확히는 건물 옥상에서 일하게 됐단다. 지난 3년 동안 이곳에서 출판사를 꾸려온 나는 건물의 옥상에 사람이 올라갈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는데 말이지. 그런데 대관절 옥상에서 무슨 일을 한다는 건가.

사연인즉 이랬다. 얼마 전에 강남오피스플라자의 건물주가 세상을 떠났는데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건물의 옥상을 솔미씨에게 무상으로, 게다가 솔미씨가 원하는 날까지 임대해 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그런 유언을 남겼을까. “기억나세요? 제가 예전에 서점 이벤트에 필요한 비품을 사러 나갔다가 한참 동안 돌아오지 않아서 다들 걱정하셨잖아요.”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솔미씨가 건물을 관리하는 수위 할아버지랑 수다를 떠느라 늦게 왔다고 했잖아.” 그 수위 할아버지가 건물의 주인이었던 거다. 자산가여서 여유로운 노후를 보낼 수 있었지만 집에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이었던 노인은 직접 건물의 자질구레한 일을 관리하며 치매도 예방할 겸 수위 일을 하러 나왔는데, 이곳에 근무하는 누구도 그의 정체를 몰라서 홀대했지만 오직 솔미씨만이 곧잘 말동무가 되어 주었던 게 인연으로 발전했던 모양이다. 물론 그녀도 당시에는 수위 할아버지가 건물 주인인 걸 몰랐다.

우리 출판사를 그만둔 이후로 솔미씨는 많은 생각을 했다고 한다. 직원들이 모두 그토록 열심히 일하는데도 불구하고 어째서 출판사의 책이 점점 팔리지 않는지. 사장인 나만 해도 아침 일찍 출근해서 매일 새벽까지 일하고, 사장이 그렇다 보니 직원들도 야근을 밥 먹듯 하기 일쑤였다. 사생활까지 희생하며 애쓰는데 이대로라면 사람을 키우지 못하고 소모될 뿐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는 거다. 나는 다소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뭐 이런 건방진 애가 있나. 일을 못해서 잘린 직원이 회사 걱정을 사장처럼 하고 있다니. 그래서 한마디 해주려는데 솔미씨가 이번에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출판사의 실적이 점점 나빠지는 이유는 야근이 많기 때문이에요. 제가 비즈니스 관련 책에서 읽었는데 야근이 많으면 야근을 한다는 만족감으로 점점 자신에게 관대해지고 효율은 낮아지고 피로는 쌓이고 사생활을 할애하니까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기지 않는대요.”

퇴사 종용 모진 말에 퇴사
어느 날 우연히 만남


하긴, 확실히 맞는 말이긴 하다. 아무래도 야근이 있으면 근무시간에 여유를 부린다고 할까, ‘어차피 이따가 야근할 텐데’ 하고 일을 미적미적하는 경우가 많아지게 마련이니까. 그녀가 말을 이었다. “지난 일 년 동안 고민한 끝에 내린 제 결론은 뭐냐면 강남오피스플라자의 옥상에 ‘비어가든’을 열기로 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다들 비어가든에 가려고 일찍 일을 마치고 싶어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실제로 얼마 후, 건물 옥상에 비어가든이 문을 열었다. 상호가 뭔 줄 아나. ‘스티브잡 술’이란다. 나는 기가 막혔다. 이건 무슨 고등학생들이 하는 축제도 아니고 말이지. 손님을 바보로 아는 건가. 타산을 맞추려면 상당한 경험과 인재가 필요하다. 혼자서, 그것도 솔미씨처럼 정신없는 인간이 제대로 팔 수 있을 리가 없다. 장사를 우습게 보는구나. 창업이라는 게 만만한 게 아니라는 걸 뼈저리게 느낄 거라며 마음속으로 비웃었다.

돌아오는 월요일 아침, 나는 강남오피스플라자 앞에서 전단지를 나눠주는 솔미씨와 또 마주쳤다. 그녀의 모습은 실로 가관이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에나 나올 법한 복장으로 등에는 거대한 맥주통 모양의 비어 탱크를 짊어진 채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맥주가 맛있는 계절입니다. 이 빌딩 옥상에 비어가든 ‘스티브잡 술’을 오픈했어요. 일단 한번 와보세요. 전단에 쿠폰도 있어요.” 나는 쯧쯧 혀를 찼지만 효과는 만점인 듯했다. 적어도 강남오피스플라자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모두 옥상에 재밌어 보이는 술집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았으니까. 더군다나 솔미씨가 시시때때로 전자레인지를 빌려 쓰겠다는 둥, 생수를 좀 받아 가겠다는 둥 하면서 우리 출판사 사무실에 불쑥불쑥 들어와서는 “오늘 밤 불꽃놀이는 이 건물 옥상에서 제일 잘 보이는데”, “오늘 밤 슈퍼 문이 끝내주니까 여러분 야근하지 말고 와서 한잔하고 가세요”라며 큰 소리로 유혹하는 말을 외치고 도망가는 바람에 우리 회사 직원들도 하나둘씩 비어가든 ‘스티브잡 술’에 드나드는 듯했다. 나는 사무실에 외부인이 못 들어오도록 전자자물쇠를 달아놓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아마 그 즈음부터였을 거다. 직원들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전화가 울릴 때마다 다들 한 번 이상 울리지 않게 서로 경쟁하듯 수화기를 들었다.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빨라지고 촘촘해졌다. 무슨 회의를 하든 효율적으로 단숨에 결론을 내기 위해 노력했다. 마감은 철저히 준수되었다. 그러고는 6시가 땡 치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모두의 마음이 옥상에 있다는 것을 손바닥 보듯 훤히 알 수 있었다. 덕분에 야근할 일이 점점 사라졌다. 더 흥미로운 대목은 비어가든 ‘스티브잡 술’에 외부 사람들이 몰리면서, 옥상이니까 그곳을 찾는 손님들이 전부 엘리베이터를 이용했기 때문에 정작 우리 출판사 직원들은 계단으로 걸어 다닐 수밖에 없었다는 거다. 그게 직원들의 건강에 도움이 되었다. 나를 포함해서 다들 조금씩 살이 빠지고 살이 빠질수록 작업 능률은 더 올라갔다. 급기야 그녀는 맥주통을 짊어진 차림으로 한강 마라톤 대회에도 출전했다. 달리다가 넘어지면서 맥주통에 담긴 맥주가 흠뻑 쏟아지는 장면이 공중파에 중계되었는데, 그게 에스엔에스(SNS)를 통해 널리 회자되면서 비어가든 ‘스티브잡 술’은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다음날 나는 솔미씨로부터 편지를 한 통 받았다. 이메일이 아니라 손글씨로 쓴 편지였다. 거기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1년 전, 저는 140군데 회사에 이력서를 넣었습니다. 하지만 받아준 곳은 사장님 출판사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입사해서 제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다른 사람 밑에서 일하기가 힘든 타입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어요. 그 후로 곰곰이 생각했고, 직접 회사를 차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지금 비어가든 ‘스티브잡 술’이 잘 되는 건 모두 사장님 덕분이에요. 남의 밑에서 일하는 것이 고역이라면 자신이 고용주가 되면 된다는 힌트를 준 사람은 사장님이에요.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옥상 술집 차려 대박
“이 모든 것은 사장님 덕분”


편지의 문장들은 내가 처음 출판사를 차렸던 2005년 겨울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나 역시 전 직장의 상사와 갈등이 심했고 그것이 창업의 단초가 되었다. 여전히 고만고만한 회사의 사장일 뿐이지만, 창업을 한 이후에는 편집자로서만 일할 때보다 여러모로 시야가 넓어졌기에 지금까지도 잘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솔미씨의 창업기는 <나는 매일 직장상사의 도시락을 싼다>라는 소설로도 출간되었다. ‘나는 다른 사람 밑에서 일하기가 힘든 타입이야’라고 느끼는 형제자매님들이라면 한 번쯤 읽어보셔도 좋을 듯하다. 이 소설을 읽고 있노라니 그 시절 건물 옥상에서 마시던 비어가든 ‘스티브잡 술’의 시원한 맥주가 떠오른다. 솔미씨는 여전히 잘 하고 있겠지.

한겨레

김홍민(북스피어 대표)

※이 콩트는 필자가 독자들이 ‘읽어보고 싶다’는 기분이 들도록 다양한 소설을 색다르게 소개하는 방식인 ‘궁금증 유발적 소설 각색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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