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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수리온 헬기, 필리핀 수출 사실상 불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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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국방 "美블랙호크가 좋다"

美훈련기 탈락 이어 수리온도… 추락하는 '방산 한국'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이 추진 중인 한국형 기동헬기 수리온(KUH-1)의 필리핀 수출이 사실상 좌초된 것으로 11일 알려졌다. 군 고위 관계자는 이날 "기동헬기 사업을 추진 중인 필리핀 정부가 기체 부분에 대한 평가에서 수리온보다는 미국산 UH-60(블랙호크)에 높은 점수를 줬다"며 "우리 측에서 기업 협력과 각종 추가 지원 등을 '옵션'으로 내걸고 막판 총력전을 벌이고 있지만 사실상 뒤집기는 힘든 분위기"라고 했다.

이는 필리핀 정부 관계자들의 공개 발언에서도 드러났다. 델핀 로렌자나 필리핀 국방장관은 최근 "마침내 블랙호크를 구매하는 것이 가장 좋은 옵션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며 수리온이 아닌 블랙호크를 구매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로렌자나 장관은 "우리는 자금 부족으로 수리온 10대를 구입할 수밖에 없다"며 "그런데 (블랙호크는) 16대를 구입할 수 있다"고 했다.

방위사업청 관계자는 "비록 기체 평가는 그렇게 났지만, 최종 결정된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이번에 사실상 좌절된 수리온 필리핀 수출은 현 정부가 역점을 기울여온 사업이다. 국방부는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의 지난 6월 방한 때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 앞 연병장에 수리온을 전시해 놓기도 했다. 당시 두테르테 대통령은 10여 분간 수리온의 성능과 작동법에 대한 설명을 듣고, 헬기 시동을 직접 걸어보기도 했다. 이후 두테르테 대통령은 델핀 로렌자나 국방장관에게 수리온 구매 검토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문제는 '가격 경쟁력'이었다. 군 관계자는 "수리온 한 대 가격이 250억원 안팎인데 필리핀 측에서 책정한 예산으로는 10대를 살 수 있는 수준이었다"며 "하지만 블랙호크 측에서 같은 가격에 16대를 제안했으니 그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다"고 했다. 정부 관계자는 "결국 전투기나 전투 헬기를 수출하려면 미국과 경쟁을 해야 하는데, 미국 측의 견제가 심한 측면도 있다"며 "시장 진입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했다.

수리온의 친척 격인 해병대 상륙 기동헬기 '마린온' 추락 사고 역시 이번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필리핀 정부에서 안전 문제를 직접 거론한 것은 아니지만, 수리온으로 기우는 듯했던 필리핀 헬기 수주 건에 블랙호크 등이 끼어들 여지가 생겼다는 관측이다. 사고 직후 청와대 김의겸 대변인이 나서서 "우리의 수리온 헬기의 성능과 기량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했지만, 수리온의 이미지 추락을 막지는 못했다.

조선일보

기대를 모았던 수리온 수출 사업마저 휘청거리면서 국내 방산 업계는 올해 '최악의 한 해'를 보내게 됐다.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은 지난 9월 미국 공군 차기 고등훈련기(APT·Advanced Pilot Training·일명 T-X 사업) 사업 수주전 탈락에 이어 2연속 타격을 입게 됐다. 방산 업계 관계자는 "고등훈련기 사업에서 탈락한 뒤에도 KAI는 필리핀 수리온 수출 건에 대해 장밋빛 전망만을 내놨다"며 "수뇌부 등이 제대로 된 분위기 쇄신을 해야 했는데 제대로 한 건지 우려스럽다"고 했다. 인도네시아와 추진 중인 한국형 전투기(KFX) 사업도 인도네시아 측에서 사업비 지급을 지연하면서 공동 개발이 좌초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한 국책연구소 관계자는 "인도네시아가 경제 사정을 이유로 일부 사업비를 지연 지급하고 있다"며 "이 때문에 인도네시아 측에서 KFX 사업에서 손을 뗄 수도 있다는 말이 나온다"고 했다.

지표상으로도 방산 업계는 날개 없는 추락을 거듭하고 있다. 산업연구원(KIET)이 올 8월 공개한 분석 결과를 보면 국내 방산 10대 기업의 작년 매출은 9조5000억원으로 2016년에 비해 18%가량 줄었다. 수출은 1조5000억원으로 35% 가까이 감소했다. 특히 방산 수출을 견인해온 KAI의 수출은 전년 대비 83% 급감했다. 영업이익률도 바닥이다. 유도(誘導) 무기 전문 기업인 LIG넥스원의 작년 영업이익률은 0.24%로 시중은행 1년 정기예금 금리(2% 안팎)보다 낮다. 한화그룹 방산 계열사들도 1.8~3.9%의 영업이익률을 기록했다.

문제는 추락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 방산 업계 관계자는 "정부에서 방산 수출을 강조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제대로 된 결과물이 나오지 않고 있다"며 "검찰·감사원 등이 과도하게 방산 비리 의혹을 수사·감사하는 관행을 바꾸고, 구조적 문제도 해결해야 하는데 그런 의지는 별로 없는 것 같다"고 했다. 신종우 한국국방안보포럼 사무국장은 "수리온 사업도, 미 고등훈련기 사업도 제대로 진행되지 못한 것은 결국 무기 가성비가 외국 무기 체계보다 떨어져 국제적 경쟁력을 잃었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이라며 "정부는 성과 포장과 낙관적 수출 전망에서 벗어나 현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양승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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