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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베르톨루치 감독 별세…‘미투’ 시대에 역풍 맞은 에로티시즘의 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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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배우와 사전 합의없이 성폭행 장면 촬영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등 논란의 문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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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현지시간) 타계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이 2012년 프랑스 칸영화제에 참석했을 때 모습. [EPA=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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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1972) '마지막 황제'(1987) 등 세계 영화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이탈리아 출신의 거장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이 별세했다. 77세. AP통신 등은 현지 안사 통신을 인용해 오랜 기간 암으로 투병해온 베르톨루치 감독이 로마의 자택에서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고 26일(현지시간) 전했다.

1960년대 영화계에 입문한 그는 일생을 논란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리버럴리즘이 만개했던 ‘68세대’의 일원으로서 그는 허무주의에 빠진 인간들의 자유분방한 성적 유희를 대담하게 스크린에 담았다. 작품들은 개봉 당시에는 예술로 포장된 외설이라는 비판을, 수십년 지나선 여성의 성(性)을 대상화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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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 주연을 맡았을 때 마리아 슈나이더는 19세의 프랑스 신인배우였다.


대표적인 게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다. 베르톨루치가 직접 각본을 쓰고 감독한 이 작품은 아내의 자살로 혼란스러워 하는 중년 남자가 파리의 한 아파트에서 우연히 만난 젊은 여성과 맹목적으로 섹스하는 내용을 담았다. 주연은 당시 48세의 할리우드 명배우 말론 브란도와 19세의 프랑스 신인배우 마리아 슈나이더가 맡았다.

영화는 개봉 당시에도 적나라한 성애 묘사와 거친 폭력성 때문에 이탈리아 검열 당국으로부터 상영 금지 및 필름 파기 처분을 받는 등 격렬한 논란에 휩싸였다. 미국에서도 노골적인 장면을 삭제하고도 당시 X등급(17세 이하 미성년자 관람불가)을 받을 정도였다. 게다가 40여년이 흐른 2016년 전 세계적으로 페미니즘·반(反)성폭력 캠페인이 활발해졌을 즈음 다시금 논란의 대상이 됐다. 마리아 슈나이더가 2007년 영국의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영화 속 성폭행 장면이 사전 합의 없이 이뤄졌다”고 주장한 게 재조명되면서다.

문제의 장면은 아파트 바닥에서 주인공 폴(말론 브란도)이 잔느(마리아 슈나이더)를 거칠게 제압하고 버터를 윤활유로 활용해 항문 섹스를 하는 장면이다. 슈나이더는 “이 장면은 각본에 없던 것인데 나는 촬영 직전에 알게 됐다”면서 “실제로 눈물이 났고, 굴욕감을 느꼈으며 어느 정도 성폭행 당한 듯한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또 “각본에 없는 내용을 알게 된 즉시 매니저나 변호사를 불러 따졌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땐 그래야 하는 걸 몰랐다”고 후회했다. 다만 일각에서 제기된 의혹과 달리 그 장면에서 실제 성행위가 있었던 건 아니라고 덧붙였다.

이 인터뷰가 화제를 모으자 베르톨루치의 2013년 인터뷰 영상도 다시 유튜브에서 재조명됐다. 베르톨루치는 "합의하지 않은 것은 성폭행 장면 자체가 아니라, 이 장면에서의 버터 사용 여부였다"면서 “마리아가 배우가 아니라 진짜 여자로서 수치스러워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그는 “죄책감은 느끼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고도 했다. 자신의 의도가 연출가로서 이상적인 장면을 얻기 위해서였다는 변명이었다. 하지만 슈나이더가 이로 인해 일생을 트라우마에 시달린 사실이 밝혀지면서 베르톨루치를 향한 비난은 사그러들지 않았고 이후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캠페인에서도 다시금 거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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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베르톨루치 감독(왼쪽)이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촬영하면서 주연 배우 말론 브란도(가운데), 마리아 슈나이더와 얘기를 나누고 있다.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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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톨루치는 1941년 이탈리아 북부 파르마에서 유명한 시인 아틸리오 베르톨루치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친구였던 문학비평가 겸 영화감독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의 조감독으로 영화계에 본격 입문했다. 62년 '냉혹한 학살자'가 베네치아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영화 중흥기에 사회성 짙은 메시지와 감각적 영상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혁명전야’(1964) '1900년'(1976) 등으로 명성을 쌓은 뒤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의 운명을 그린 '마지막 황제'(1987)로 88년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 등 9개 주요 부문을 휩쓸었다. 이후에도 '몽상가들'(2003) '이오 에 테'(2012)등 활발한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2007년엔 그간의 공적을 인정받아 베니스영화제 특별상인 명예 황금사자상, 2011년에는 칸영화제 명예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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