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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청년단이 고문하던 나는 열여덟살 임신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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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제주4·3 동백에 묻다 2부 ⑥

‘시어머니-며느리-손자’ 한 가족 3대의 4·3 수난사

시어머니, 아들 셋 잃고 행정 오류로 10개월간 수형 생활

며느리는 임신한 몸으로 고문당하고 수용소서 아들 낳아

손자는 행방불명 아버지 유해 찾아 유족회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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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더위가 한풀 꺾인 초가을이었다. 1949년 9월 어느 날, 18살 새댁은 시어머니(당시 41살)와 함께 제주읍 연미마을 공회당으로 끌려갔다. 이들을 끌고 간 대동청년(대청)단원들은 새댁을 공회당 한쪽에 쌓아놓은 공사용 목재 더미로 밀어 넘어뜨렸다. 이들은 새댁의 몸 위에 나무토막 2개를 올려놓은 뒤 양쪽에서 밟으며 “서방 어디 갔느냐”며 추궁했다. 당시 새댁은 임신 초기였다. 임신부인 며느리가 다칠까 봐 시어머니가 눈물로 호소했다. 그러나 대청단원들은 시어머니의 뺨을 때리며 모진 짓을 계속했다.

임신부에 가해진 모진 가혹행위

지난 16일 만난 ‘그날의 새댁’ 문순선(88·제주시 연동)은 당시 일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한 가족 3대의 4·3 수난사는 이날 시작됐다. 연미마을이 고향인 문씨는 17살이던 1947년 말 마을에서 800여m 떨어진 어우눌로 시집가 그곳에 살고 있었다. 한울타리 안에서 시어머니(고난향·작고)는 안거리(안채)에, 남편(송태우·당시 19)과 문순선은 밖거리(바깥채)에 살았다. 송씨 부부는 농사밖에 몰랐다.

“새벽 어스름 녘이었어. 동쪽 밭으로 총소리가 나고, 불이 벌겋게 타오르더라고. 사람들 우는 소리도 나고. 시어머니가 밖거리로 뛰어와서 우리한테 대밭 속에 가서 숨으라고 했어. 집 주변은 대나무밭이었지. 남편은 그곳으로 가서 숨었고, 나는 부엌 옆 자그마한 골방에 숨었어. 시어머니가 골방은 찾지 못할 것이라며 그곳에 숨으라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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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안 가 대청 단원들 목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집안을 헤집어놓으며 시어머니한테 “남편 어디 갔느냐”, “산에 보냈느냐”고 윽박질렀다. 시어머니는 “일본 간 지 2년이 넘었다. 동네 주민들이 다 안다”고 하자 대청 단원들은 “폭도가 무슨 일본을 가느냐”며 시어머니를 막무가내로 때렸다. 시아버지는 4·3이 일어나기 전 아들과 며느리의 결혼식 옷감을 구한다며 일제 강점기 때 살았던 일본 오사카로 가고 없었다. 집 밖으로 나가던 이들이 다시 돌아와 골방문을 열고 총으로 이곳저곳을 쑤셨다. 붙잡힌 문순선은 “잘못했다,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이들은 시어머니와 문씨를 연미공회당으로 끌고 갔다. 그곳에서 임신한 문씨에게 가해지던 모진 고문은 경찰관 3~4명이 오자 비로소 멈췄다.

오라동은 1948년 5월 미군이 촬영한 ‘제주도의 메이데이’(Mayday on Chejudo)가 촬영된 곳이고, 4·3이 본격화 하기 전부터 크고 작은 사건이 많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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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드린 할머니 위에 할아버지가 올라타 기어가게 해”

그곳에서 목격한 대청 단원들의 패륜적 행동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때 공회당 마당으로 들어가면서 봤지. 할머니들을 엎드리게 하고, 할아버지들은 말 타듯 그 위에 올라타게 한 뒤 마당을 빙빙 돌며 기게 했어. 그게 인간이냐 할 짓이야?” 이날의 장면은 당시 공회당에 붙들려온 주민들 뇌리에 깊이 박혔다.

경찰들이 문순선 등 여자 2명과 남자 2명의 손을 묶어 제1구경찰서(제주경찰서)로 끌고 갔다. 경찰은 문씨에게 “어떻게 왔느냐”, “회의 보러 가거나 길거리에서 삐라를 주운 적이 있느냐”고 물었고, 문씨는 “잠자다 잡혀 왔다. 회의나 삐라는 들어본 적도 본 적도 없다”고 했다.

경찰서로 끌려간 지 닷새 만에 풀려나 어우눌 시댁으로 왔지만, 무서워 집에 머무를 수가 없었다. 얼마 뒤 경찰과 대청단원들이 동네에 불을 질렀다. 1948년 12월께로 기억한다. 집이 불타자 시어머니와 그 자녀들, 문순선과 남편은 우영팟(텃밭)과 냇가 등을 전전하다 열안지오름 쪽으로 몸을 피했다. 토벌대가 올라오고, 함께 숨어지내던 이들이 죽어갔다. 시어머니는 큰아들(문순선의 남편)한테 “우리 데리고 다니다 너까지 죽는다. 아무 데라도 가서 숨어 살라”고 했다. 남편과는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나중에야 남편이 1949년 10월 트럭에 실려 제주비행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봤다는 소식을 들었다. 남편은 지금도 행방불명 상태다. 젊은 새댁 문순선은 열아홉에 청상이 됐다. 남편과 함께 보낸 기간은 1년 남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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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만 가세요”…귀순한 남자들 발가벗겨 구타

한라산에 눈이 내렸다. “토벌대가 포위했다”는 말이 들리면 정신없이 달아났다.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집안 식구들 걱정 말고, 너라도 살아야 한다”고 했다. 시어머니는 4살 난 시동생을 업었다. 6살 난 시누이는 눈쌓인 산길을 잘 걷지 못하자 “어머니만 가세요. 난 그냥 여기서 자겠어요”라고 했다. 문순선은 임신한 몸으로 그런 시누이를 업고, 7살 시동생은 손을 잡고 산을 올랐다. 토벌대가 다가오면 덤불 속에 엎어져 위기를 넘기곤 했다. 먹을 것이 없어 며칠을 굶어도 무서움 때문에 배고픔도 느끼지 못했다.

산속에서 스무날을 보냈다. 귀순하면 살려준다는 소문이 돌았다. 시어머니와 문순선은 “죽이면 죽더라도 아래로 내려가자. 더는 이렇게 못 살겠다”며 ‘귀순’했다. 1949년 1월께였다. 이들이 처음 간 곳은 제주읍 서문통의 학교건물이었다. “대청단원들이 남자들을 불러내 옷을 모두 벗긴 뒤 손을 들고 걷게 하고는 몽둥이로 후려쳤어. 신음이 끊이질 않아 한시도 살지 못할 것 같았어. 그 사람들은 ‘내려오면 살려준다’는 말을 믿고 내려온 사람들이었지. 우리도 저렇게 당할까 봐 겁을 먹고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는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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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정공장 좁은 수용실 안에서 아기 낳아

보름 남짓 학교건물에 갇혔던 시어머니와 문순선은 제주시 건입동의 주정공장으로 옮겨졌다. 주정공장은 수용소였다. 귀순한 주민들은 이곳에서 석방되거나, 다른 지방 형무소로 이송됐다. 주정공장에서는 “어떻게 살다가 왔느냐”는 조사만 받았을 뿐, 심한 취조는 받지 않았다. 그러나 작은 방 한 칸에 수십명, 수백명을 몰아넣은 수용소 환경은 열악했다. 낮에는 밀착해 앉아 시간을 보냈고, 잠잘 때는 발을 뻗지 못했다.

그런 환경에서 문순선은 1949년 6월6일 송승문(69)을 낳았다. 한밤중에 산모가 아기를 낳는데도 방 안의 수용자들은 대부분 몰랐다. “시어머니가 같은 방에 있던 아는 아주머니를 가까이 불렀어. 그 아주머니가 내 허리를 ‘폭’하고 감싸 안으니까 아기가 나왔어. 오래 아팠으면 같은 방 사람들이 다 깼을 텐데, 다행이었지.” 아기를 낳자 시어머니는 입고 있던 몸빼(일바지)를 벗어 산모와 아기를 감쌌다. 미역국은커녕 물 한 모금 마시기도 어려웠다. 방문을 지키던 남자조차 “어떻게 아무런 기척도 없이 아기를 낳았느냐. 깨어 있었는데도 아기 낳는 걸 몰랐다”고 했다.

이름 바뀌어 간 전주형무소

주정공장에서 수용생활을 한 지 한 달 남짓 지난 뒤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 같은 해 7월 초순, 수용소 관계자가 “고난향”하고 시어머니 이름을 불렀다. “예”하고 달려가자 “아주머니는 육지로 가게 됐다”고 했다. 시어머니는 기가 막혔다. “무슨 일을 했다고 나를 육지까지 보내느냐”고 하소연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시어머니는 함께 지내던 6살 시누이와 7살 시동생을 친척들 집에 맡기고, 4살 난 시동생을 데리고 전주형무소로 갔다. 국가기록원에 소장된 시어머니 고난향의 군법회의 판결 날짜는 7월7일로 돼 있다.

얼마 뒤 형무소장이 시어머니를 부르더니 “이름이 바뀌어 잘못 왔다. 3년형 정도 받았으면 바로잡아 돌려보낼 텐데, 10개월만 받았으니, 여기서 수양이나 하고 가라”며 보내주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그곳에서 4살짜리 시동생을 홍역으로 잃었다. 석방된 시어머니는 문순선에게 “이름이 바뀌어 왔다는 말을 듣고 ‘육신이 털렸다’고 망연자실해 했다”고 한다. 오라동 친척집에 맡겨진 7살 시동생은 쑥 캐러 다녀오는 길에 동네 냇가에서 멱을 감다가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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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순선은 시어머니가 육지 형무소로 옮겨간 뒤 주정공장에서 낳은 핏덩이를 안고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고향 집은 폐허였다. 오라동 외삼촌 집의 방 한 칸을 빌려 생활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시어머니는 큰아들과 7살 아들이 죽은 사실을 알게 됐다. 둘째 아들은 시내 친척집에 살아 화를 면했다. 아들 넷 가운데 셋을 잃은 시어머니와 문순선은 억척스럽게 일했다. 마을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땔감을 해다가 시내에 내다 팔았다. 돈을 모아 밭을 사고 집을 지었다.

아버지 유해를 찾는 아들

남편과의 인연은 주정공장에서 낳은 아들, 송승문이 이었다. 지난 2007년 제주공항에서 4·3 당시 암매장된 유해 발굴작업이 진행됐다. 송승문은 행여나 아버지 유골이 수습될까 마음을 졸였으나, 아버지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연좌제 때문에 변변한 직장 한번 다니지 못했다”는 송승문이지만, 한 번도 아버지를 원망해본 적이 없다. 그는 “아버지 유해를 찾고, 찾으면 모시는 게 자식 된 도리”고 했다.

“그 시국을 원망해 무엇하겠어? 그런 세상 다시 안 오게, 다시는 그런 시국이 안 오게 해야지.” 결혼생활 1년 만에 남편을 떠나보낸 문순선의 말이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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