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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오은영의 화해] 임신 중 당한 성추행에 홀로 소송… 복직할 생각하면 숨이 막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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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저작권 한국일보] 김경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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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자리 임원 추행에 용기 냈지만

안정적 회사 그만두고 꿈 좇으려니

‘왜 남편 짐 돼야 하나’ 매일 우울

부러워할 스펙ㆍ평탄한 삶 같지만

인생 단계마다 남보다 더 큰 좌절

저는 육아 휴직 중인 초보 엄마예요. 어떤 사람들은 육아가 힘들다고 하지만 저는 딸과 보내는 이 시간이 너무 행복합니다. 하지만 이 시간이 끝나고 내년에 회사에 복직할 생각을 하면 심장이 떨리고 미칠 것 같아요.

지난해 임신 초기였던 저는 술자리에서 회사 임원에게 성추행을 당했어요. 회식자리를 마련했던 해당 임원이 이 자리에서 저를 포함한 몇몇 직원들을 성추행했습니다. 끔찍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 저는 이 사건을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가려고 했어요. 하지만 소문이 일파만파 퍼졌고 회사에서는 이를 무마하려고 피해 직원들을 회유했습니다. 다른 직원들은 회사와 합의를 했고, 저는 홀로 버텼습니다. 결국 제게 불이익을 주면 ‘대외기관에 고발하겠다’고 해 해당 임원이 스스로 자리를 물러나면서 일이 마무리됐습니다.

회사를 상대로 싸우는 이 과정은 저에게 정말 지옥과도 같았습니다. 자리를 비우면 인사 관계자들이 언제 자리를 비웠는지 감시했고, 사건 발생 이후에 ‘애초에 그 자리에 간 게 문제지’, ‘혼자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등의 뒷얘기도 제가 감당하기 너무 벅찼습니다. 사건을 부풀려 말하는 이들도 있었지요.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함께 일했던 사람들과 회사에 대한 회의감이 커졌습니다. 저에게는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든 일이었는데, 그들에게는 그저 가십거리에 불과했습니다.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감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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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남들이 보기에는 평범하고 유복하게 자랐어요. 공무원이셨던 부모 아래에서 명문대를 나와 번듯한 직장에 취직했으니까요. 하지만 대학을 나오기까지 저는 제 스스로 무엇인가를 해본 적이 없습니다. 늘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해 왔습니다. 어렸을 때 엄마에게 온몸을 맞아가며 한글을 배운 기억도 있고, 초등학교 고학년 때까지도 엄마와 함께 횡단보도를 건넜습니다. 대학도 부모가 선택했어요. 그렇다고 부모가 강압적이거나 폭력적이신 분은 아니었어요. 제가 스스로 선택할 일이 없었을 뿐이었죠. 그런데 성인이 돼서는 많이 힘들었습니다. 대학 때 폭식증으로 고생하기도 했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숨이 막히는 불안 증세도 컸습니다. 저는 일기를 쓰는 습관이 있는데 예전 글을 보면 ‘나의 삶은 나와 나의 투쟁으로 얽혀져 있다’고 썼더군요. 제 마음속에는 항상 화나 있는 아이가 있습니다. 다행히 다정다감하고 그런 저를 보듬어주는 남편을 만나 조금 편해졌는데 회사에서 끔찍한 경험을 하면서 다시 삶이 요동치고 있습니다.

아직 사건이 끝난 것도 아닙니다. 문제의 임원은 사건 이후에도 주변에 각종 안 좋은 소문을 내고 다닙니다. 가만히 있다가는 거짓이 진실이 되는 상황이 벌어질 것 같아 결국 저는 어머니와 고민 끝에 법정 소송을 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이 제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저 평범하게 회사생활을 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제가 제일 큰 희생자인데 모든 것들이 제게 적대적인 상황이 너무 힘이 듭니다.

너무 고통스러워 회사를 나오자니 당장 현실적인 문제들이 마음에 걸립니다. 남편은 저를 지지해주고, ‘원한다면 회사를 그만두어도 좋아. 네가 원했던 일을 하길 바라’라고 격려해줍니다. 하지만 안정적인 회사를 그만두고 불안정한 미래를 선택하기에 경제적인 문제가 큽니다. 매일 아침마다 출근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면 ‘내가 왜 남편의 짐이 돼야 하나’라는 생각에 우울해지며 눈물이 납니다. 이럴 때마다 ‘회사에 복귀해서 경제적으로 살림에 보태야지’ 혹은 ‘내가 복직해서 당당하게 회사를 다니는 게 거짓 소문에 대응하는 최선의 방법이야’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막상 회사를 다니면서 부딪힐 상황을 상상하면 숨이 막힙니다. 이 모든 문제를 뒤로 하고 제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해도 될지 너무나 고민스럽습니다.

이모현(가명ㆍ29ㆍ회사원)
한국일보

#고학년까지 횡단보도 부모랑 건너

어린시절 ‘주도성 경험’ 부족 탓에

외부 상황에 대처 능력 취약해져

소송도 엄마에게 의존하며 죄책감

이번엔 스스로 판단하고 존중하길

모현씨, 당신의 사연을 읽고 인간의 인생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번 해 보았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흔히들 이렇게 생각을 하지요. 학생들은 밤을 새우고 공부를 열심히 하면 성적이 잘 나올 것이라고 생각을 해요. 부모들은 사랑으로 자식을 키우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뒷바라지를 하면 자식이 잘 크고 행복하게 살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지요. “열심히 살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야.” 인생이 과연 그럴까요. 모현씨는 마음이 따뜻하고 배려심이 많은 좋은 사람이에요. 매 순간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왔어요. 게다가 외모도 출중하고 공부를 잘해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좋은 대학을 졸업했어요. 그렇다면 모현씨의 인생은 행복해야 할 텐데, 삶의 과정에서 매 순간이 어렵고 괴롭고 이 고통을 견뎌 나가기 위하여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고 지지와 위로와 격려를 하면서 투쟁하듯이 살아왔어요. 그렇게 열심히 살아낸 당신의 삶이 따뜻한 배우자를 만나고, 아이를 낳고 행복해지려는데 갑자기 예상치 못한 불행이 닥쳐 다시 한번 흔들리고 있네요.

저는 모현씨가 대견하기도 하고 가엽고 안쓰럽습니다. 모현씨의 인생에서 무엇이 빠졌기에 매 순간, 인생의 단계마다, 삶의 위기마다 이토록 힘든 걸까요.

인간은 성장과 발달과정을 겪어가죠. 그 과정에서 주도성의 발달을 성공적으로 해내야 하거든요. 주도성은 어떤 일을 해내고 어려움을 해결하고 매일매일을 살아나갈 때 그 과정에서 자신이 주인이 되어 적극적으로 해나가는 능력을 의미하죠. 그런데 당신은 스스로 주도권을 가지고 생각하고, 결정하고, 그것을 행동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그렇게 된 데는 당신의 부모가 당신이 잘되기를 바라서, 그렇게 하는 것이 더 많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해주면 딸이 행복할 거라고 판단해서, 실패나 어려움을 겪지 않게 하려고 미리 그것들을 제거하고 부모가 결정하고 해결을 했죠.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도록 횡단보도를 혼자 건너본 경험이 없다고 했지요. 그 나이쯤 되면 횡단보도에서 좌우를 잘 살피고 혼자도 건너가보고 위험을 알아차리고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할 때인데, 당신의 부모는 지레 지나치게 위험을 염려해 위험을 차단하고, 겪지 않게 했어요. 그러다 보니 성장과정에서 모현씨가 스스로 결정하고, 판단하고 직접 해보고 그 과정에서 위기도 해결해 보고 실패나 좌절을 겪고 회복하는 부분들이 많이 빠져 버린 거죠. 이 과정을 직접 겪어야 내적 성장을 하고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알게 되고 마음이 단단해지거든요. 주도성의 발달이라는 인생의 과제를 제대로 겪지 못한 모현씨는 외부 상황에 대해 취약해진 것 같아요. 지나치게 다른 사람에게 미안해하고, 죄책감을 갖고 있지요. 좋은 배우자를 만난 건 다행인데, 그에게 도움이 못 되는 것 같아 미안하고, 모현씨에게 엄격하게 했던 부모에 대해서도 미안해하고 있지요. 보통은 ‘내가 어른이 돼서 괜찮아졌지만, 부모의 희생과 보호가 아이 때는 힘들었다’고 얘기하는데, 모현씨는 ‘바쁜데도 나를 챙겨준 부모 때문에 힘들었지만 지지해주는 데 대해 고맙고 미안하다’고 말하고 있어요. 자기주도성이 취약한 사람은 지나치게 미안해하거나 죄책감을 느끼지요. 모현씨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한 경험이 없어 미안함과 죄책감의 감정을 많이 느끼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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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현씨, 당신이 겪었던 그 불행한 일은 부당한 일이었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어’, ‘그 임원이 회사에서 잘리는 건 당연한 일이야’, ‘나는 떳떳하게 행동했는데, 부당한 일을 당했어’라는 반응은 당연한 겁니다. 당신이 잘못해서 생긴 일도 아닌데다 그 상황에서 당신이 할 수 있었던 일도 없었지요.

제가 마음이 아프고 안타까운 것은 당신이 어렸을 적에 스스로 뭔가 결정하고 행동하는 주도권을 가지지 못한 것을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온 당신의 삶에서 이 부당한 일이 또 생겼다는 겁니다. 회복해서 다시 일어서려는 당신에게 너무 가혹하고 끔찍한 일이 생긴 거죠. 모현씨, 당신이 회사에서 겪었던 일들에 분노를 느끼고 다시 돌아갈지 말지 고민하는 것은 누구나 당연히 드는 감정이에요. 그게 잘못된 게 아니에요. 잘 모르면서 소문을 퍼트리는 사람들은 비굴합니다. 비굴함은 인간의 나약함과 미성숙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모습이죠. 그보다 더한 것은 가해자가 자신이 잘못한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당신을 탓하고, 비난하는 비열함이죠.. 당신은 하나도 잘못한 게 없고, 떳떳하고 당당해야 합니다. 당신을 추행했던 그 임원이 뻔뻔하게 나오는 데 대해 당신이 법적 책임을 묻는 것 역시 정당한 일입니다. 당신이 이제껏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위기상황에서 계속 투사가 되고 싶지 않았고, 법적 책임도 묻고 싶지 않았다는 생각이 드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 모현씨의 마음이 흔들리고 괴로워진 거지요. 법적으로 가해자에게 책임을 따져 묻는 게 정당한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모현씨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그렇게까지 과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있어, 엄마에게 다시 도움을 구하지만 모현씨의 주도성이 빠진 결정 과정에서 미안함과 죄책감이 느껴지는 거죠. 이 미안함과 죄책감은 누구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인가요?

저는 당신에게 ‘당신은 옳게 잘 살아왔어요. 갑자기 당신의 뜻과 전혀 상관없이 닥쳐온 불행에 분노하는 것도 당연한 거예요. 가해자에게 법적 책임을 물어서 잘못했다는 것을 강하게 알려주고 다시는 당신에게 잘못을 전가하지 못하게 해야 해요’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뒤에서 소문을 내고, 친했던 사람들이 배신을 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기분 나쁘고 괴로운 일이지만 당신의 존귀함이나 그 누군가가 끔찍이 사랑하는 존재인 당신의 근간을 흔들 만한 요소들이 아니에요. 당신이 하는 일들은 옳은 행동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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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현씨, 회사 복직을 결정하는 건 힘든 일인 건 맞아요. 제가 드릴 수 있는 조언은 경제적인 이유보다 당신이 한 행동이 옳고, 정당하고, 당신이 주위 사람들로부터 잘못된 행동을 한 것처럼 취급받을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에 당신의 자리로 당당하게 돌아가는 데 의미를 두는 건 어떨까요. 당신이 돌아가는 이유에 남편이나 경제적인 면이나 회사 사람들의 생각은 최우선으로 고려할 필요가 없다는 얘깁니다. 이번에는 당신이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해야 합니다. 후회할 일이 생겨도 괜찮습니다. 인생은 늘 시행착오의 연속입니다. 제가 보기에 당신은 어떤 결정을 해도 괜찮을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좋은 사람입니다. 설사 나중에 후회하게 되더라도 당신은 잘 해결할 수 있고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일 거예요. 당신이 회사로 돌아가서 지내다가 너무 마음이 괴롭고 힘들다면 그만둬도 괜찮아요. 당신 자체가 너무나 중요한 사람이니깐 그래도 되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은 것은 이제까지 그래온 것처럼 당신 스스로를 아끼고 사랑하고, 자신의 판단을 존중하세요. 그러면 외부 사건이 당신을 흔들지 못할 거예요. 스스로를 존중하고 사랑해야 다른 사람이 주는 상처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어요. 그게 인간이 갖고 있는 내적인 힘입니다. 그 힘이 큰 당신이 이번 일을 잘 이겨내고, 앞으로의 삶이 지금보다 덜 고달팠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라봅니다.

정리=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지면을 통해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고통 때문에 힘겨운 분이라면 누구든 신청해 보세요. 사연은 한국일보 사이트(http://interview.hankookilbo.com/store/advice.zip)에서 상담신청서를 내려 받아 작성하신 후 이메일(advice@hankookilbo.com)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선정되신 분의 사연과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 지면에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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