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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고시원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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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공공주택 정책 홍보 벽보 뒤편으로 11월 9일 화재로 7명이 목숨을 잃은 서울 종로구 국일고시원 건물이 연기에 그을린 채 서 있다. / 이준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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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씩 북한이 미사일 쐈다고 하면 외국 사람들은 한국에 전쟁 일어나는 것 아니냐며 불안해 한다잖아요. 정작 한국사람들은 익숙하니까 그런가 보다 하는데. 그거랑 똑같죠. 고시원 살면서 불났다는 얘기 나올 때마다 아는 사람들이 너는 괜찮냐고 물어보지만 여기 살고 있는 사람들은 별 생각 없어요. 달리 옮길 집이 없으니까.”

지하·옥탑방·고시원의 ‘지옥고’

대학생 정모씨(26)는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한 고시원에 살면서 대학에 다니고 있다. 정씨에게 11월 9일 서울 종로구 국일고시원에서 발생한 화재사고 소식은 북한 미사일 시험발사 소식과 별다를 바 없었다. 미사일을 시험발사해도 당장 사망자가 나오지는 않는 것과는 달리 이번 고시원 화재사고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7명, 부상을 입은 사람은 11명에 달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은 든다. “그 고시원 살다 돌아가신 분들도 ‘설마 여기 불이 나겠어’ 하는 생각은 했겠죠. 고시원에 살면서 매일 불안해 할 수는 없으니까. 저도 고시원에 산 지 3년이 넘으니 이미 익숙해지기는 했는데 언젠가는 떠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까 버티는 거죠. 취업해서 돈 벌면 나갈 수 있다고. 물론 당장은 안 되더라도.” 시큰둥한 표정이었지만 정씨는 고시원 총무에게 지금 살고 있는 곳에 스프링클러가 설치돼 있는지는 물어봤다고 말했다. 그리고 옷장 안에 있던 소화기를 침대 머리맡으로 옮겼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곳저곳 떠돌며 거처를 옮겨봐야 고시원을 포함한 ‘지옥고(지하·옥탑방·고시원)’를 벗어나기 힘든 주거취약계층의 문제는 정씨처럼 당장 안정된 수입이 없어 주거비 마련이 어려운 청년층만의 일은 아니다. 화재를 겪은 국일고시원 거주자들 역시 불행 중 다행으로 목숨은 구했어도 당장 그날 밤을 보낼 새로운 거처가 필요했다. 현실을 고려하면 옮길 새 거처는 뻔하다. 고시원뿐이다. 국일고시원에 거주하면서 건설현장 일용직으로 일했던 이모씨(56) 역시 다시 인근의 다른 고시원으로 옮겼다. 보증금 없이 월세만 내고 당장 들어가 살 수 있는 곳은 현실적으로 고시원 말고는 찾기 어렵다.

국토교통부가 고시원 화재로 살 곳을 잃은 피해 거주자들에게 긴급 주거지원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지만 하루아침에 집을 옮길 수 있게 된 것도 아니다. 피해자들이 여론을 의식한 정부의 지원방침에 따라 비교적 빠르게 임시거처를 제공받을 수 있다고는 해도 여전히 서울에서만 14만명을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고시원 거주자들에게 공공 차원의 임대주택 지원은 갈 길이 멀다. 정부의 2017년도 주거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청년가구의 10.5%, 저소득가구의 10.1%는 최저주거기준에 못 미치는 주택에 살고 있다. 돈 없이 최저주거기준만이라도 넘긴 주택에 살 방도는 매입임대 등 주거취약계층 지원 임대주택 정도지만 이마저도 공급 부족은 물론 여러 현실적 여건 때문에 옮기기 힘든 형편이다.

일터와 거리가 멀면 못 들어가

조모씨(33)는 서울 강북구에 있는 고시원에 살고 있다. 조씨의 고시원 생활 경력은 10년을 넘는다. 물론 조씨도 그동안 고시원을 떠날 생각을 안해본 것은 아니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와 서울시 SH공사가 시행하는 매입임대주택에 한 차례씩 지원할 기회가 있었다. 살던 고시원이 전용 입식부엌과 전용 수세식화장실 및 목욕시설을 갖추지 못하고 1인 주거면적이 14㎡에도 못 미쳐 최저주거기준에 미달하는 주거공간이라 지원자격은 됐다. 하지만 결국 조씨는 입주를 포기했다. 한 곳은 위치는 괜찮았지만 경쟁률이 높아 들어갈 수 없었고, 다른 한 곳은 교통이 불편해 일터를 오가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차편이 드문 새벽에 인력시장으로 출발해야 하는 조씨는 당장 생활이 불편하더라도 교통편이 좋은 곳에 있는 고시원을 벗어나기가 어렵다.

“1년 전쯤 강남 쪽 현장에 다닐 때라 멀지 않은 강남·송파·강동구 쪽 매입주택 지원공고가 떴길래 직접 해당 주택을 가봤죠. 없는 시간을 겨우 내서 공고에 오른 집들을 돌아봤는데 살 만하다 싶은 집은 저처럼 방문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더라고요. 그때부터 들어가기 힘들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실제 신청 당일에 가보니 마음에 둔 집들은 이미 경쟁률이 10대 1도 넘길래 그냥 나왔어요.”

조씨는 신청 단계에서부터 ‘운’이 없으면 매입임대주택에 들어가기 힘들다는 점을 체감했다. 먼저 틈틈이 LH나 SH 공고 홈페이지에 들어가 모집기간을 확인하지 않으면 언제 모집하는지부터 알 수가 없었다. 인기가 있을 법한 집은 수십 명이 지원할 정도로 알 만한 사람은 알고 찾지만 오히려 이런 정책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경우가 더 많다. 공고 소식을 접하고 원하는 지역에 집이 나오더라도 실제 집이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려면 하루 종일 발품을 팔아야 하고, 신청 당일 지정장소에 가서 직접 신청할 때에도 시간을 내야 한다. 절대다수가 1인가구일 수밖에 없는 고시원 거주자가 생업을 중단하고 시간을 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경쟁을 뚫고 입주자로 선정됐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보증금의 벽을 넘어야 한다. SH공사 매입임대주택의 경우 평균 임대보증금은 1400만원, 평균 임대료는 13만원 수준이다. 국토부가 10월 발표한 ‘취약계층·고령자 주거지원방안’을 보면 매입임대 1순위자는 470만원까지 보증금이 낮아지고 향후 분납도 가능해지기는 하지만,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등에 해당되지 않고 적은 소득이나마 있을 경우 사실상 1순위자에 들어가기를 기대하기 어렵다. 물론 가장 지원이 절실한 취약계층부터 임대주택이 돌아가는 방향 자체는 맞지만 절대적인 공급량 자체가 적은 탓에 근로소득이 있는 저소득층 1인가구들이 최저주거기준에 못 미치는 고시원을 떠날 길은 막혀 있는 셈이다.

시민사회단체가 분석한 주거취약계층을 위한 임대주택 정책의 실태를 보면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는 확연하게 드러난다. 지난 5월 ‘홈리스 주거권 실현을 위한 법·제도 개선방안 토론회’에서 이동현 홈리스행동 상임활동가는 주거취약계층 주거지원사업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부족한 공급물량을 꼽았다. 이 활동가는 “국토부 지침에 따르면 2013년부터 2016년까지 매해 약 4500호에서 6700호가량이 공급됐어야 했으나 실공급량은 595호~1070호에 불과했다”며 “공급률 자체를 낮게 잡고서는 LH공사가 ‘물량이 소진됐다’는 내용의 공문을 두 번이나 주민센터에 보냈는데 사실상 제도를 멈춰 세운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공급물량이 지침 대비 15% 내외에 그치는 문제부터 인식하고 현실에 맞춰 대폭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다.

공급량을 떠나 정부의 지원대책이 필요한 주거취약계층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 문제 역시 정부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정책의 홍보와 전달체계가 미흡했던 이면에는 그동안 고시원이나 여관·여인숙의 ‘달방’ 등 숙박업소 거주자 등 주택 이외의 거처에 거주하는 가구에 대한 대책이 부족했던 점이 문제로 지적돼 왔다. 국토부가 주거복지 프로그램 이용률이 8%에 불과할 정도로 낮은 수준이라는 점을 인정할 정도로 체계 정비가 시급했던 것이다. 김도희 서울사회복지공익법센터 변호사는 “주거약자법은 기초지자체장이 주거약자 지원센터를 설치하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전국에 센터는 한 곳도 없고, 주거기본법은 주거복지센터를 전달체계로 삼지만 서울·경기 일부 지역과 부산을 제외하면 찾아볼 수 없다”며 “법에서 명시한 주거약자에 대한 주거실태조사도 현재 취약계층의 다양한 주거형태를 담지 못하고 있으며, 주거정보를 전달하는 핵심 전달체계들이 부재하다”고 지적했다.

고시원을 벗어나 대안으로 선택할 집을 당장 구하는 것이 어렵다면 현금으로라도 주거취약계층을 지원할 방법은 없을까. 주거 빈곤층에게 방값 등을 지원하는 제도인 주거급여제도가 있기는 하다. 신청가구의 소득인정액이 중위소득의 43% 이하라면 고시원 등 방을 빌려 생활하는 가구에 임대료 일부를 지원한다. 하지만 ‘기준임대료’ 전액을 지원받는다고 해도 서울의 경우 최대 1인 21만3000원에 불과하다. 이번에 불이 난 종로구 고시원의 방값은 창문 있는 방이 30만원 수준이었다. 월소득 71만원을 겨우 넘기는 주거급여 수급자라도 방값 전부를 지원받지는 못하는 것이다. 주거급여 수급자 전체의 평균 지급액은 월 11만원이기 때문에 현실과 정책 사이의 거리는 더욱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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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사회시민연대 등 15개 시민단체 회원들이 11월 14일 서울 종로구 국일고시원 화재 현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김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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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주자로 선정돼도 보증금의 벽

임대주택은 하늘의 별 따기인 데다, 주거급여를 받을 수 있다 해도 방값을 모두 충당할 수 없는 형편에서 소득이 낮은 주거취약계층이 선택할 수 있는 주거공간은 고시원 등 비주택 주거공간일 수밖에 없다. 당장의 방값과 생활비를 내려면 최저주거기준이나 소방안전기준은 포기하고 법적으로 주택도 아닌 공간에 맞춰 살아야 하는 것이다. 때문에 주거취약계층은 아예 임대주택에 대한 희망조차 버린 것이 현실이다. 김현미 국토부 장관이 11월 13일 국회 국토교통위에 출석해 “고시원 거주자 등이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마련한 임대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임대주택과 거주공간의 거리상 격차와 인적 네트워크 등이 맞지 않기 때문”이라며 “최근 2만명을 대상으로 주거급여 실태조사를 해보니 매입 임대주택에 입주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은 1000명에 불과했다”고 밝힌 것도 이러한 현실 때문이다.

정부도 대책으로 공공임대주택 확충을 약속했지만 열악한 주거환경 때문에 소득이 낮은 계층일수록 안전에 더 취약한 양극화를 막기 위해서는 고시원·지하방·옥탑방 등의 취약주거공간을 아예 단계적으로 폐쇄하라고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강제로 없애지 않으면 더 나은 집으로 옮길 수 없는 주거취약계층을 위해서는 주거 공공성과 주거인권을 실현할 수 있는 강제성 있는 대책이 나와야 한다는 주장이다. 집걱정없는세상·안전사회시민연대 등 15개 시민단체는 누구나 안전하고 편안한 주거권을 누려야 한다는 취지로 ‘지하·옥탑방·고시원 폐쇄 및 공공임대주택 요구 시민연대’를 출범했다.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공운영위원장은 “고시원·지하방·옥탑방에 사는 사람이 100만 가구가 넘는 등 주거 사각지대가 너무 넓다”며 “정부는 단계적으로 고시원 폐쇄 로드맵을 발표하고 집 없는 사람에게 안전한 주거공간을 보장하는 공공임대주택을 적극 확충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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