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3.19 (화)

"택리지에서 이중환이 100% 칭찬한 지역은 없습니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정본 만들어 번역한 연구자들 "실존적 고민에서 나온 책"

"1만 개 가까운 주석, 730여 개로 줄이느라 스트레스"

연합뉴스

'완역 정본 택리지' 작업에 참여한 김세호 연구원(왼쪽부터), 김경희 씨, 안대회 교수, 임영걸 연구원, 임영길 연구원, 이승용 선임연구원, 김보성 선임연구원.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이중환은 국토지리 평론가였어요. 보통은 지역을 이야기하면서 평가는 하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자신이 사는 고장이 좋다는 정도죠. 그런데 이 양반은 시대적 평가에 주관을 섞어 국토 전체를 논했어요."(안대회 교수)

"택리지를 보면 전라도에 대한 평가가 박해요. 그런데 이중환이 전라도와 평안도는 가보지 않은 것 같아요."(김경희 씨)

"이중환이 100% 칭찬한 지역은 없어요. 다 장단점을 거론했습니다."(김보성 선임연구원)

조선 후기 문인 청담(淸潭) 이중환(1690∼1756)이 1751년 세상에 내놓은 책 '택리지'(擇里志)는 당대에 베스트셀러였고, 지금은 최고의 전통 지리서로 평가된다.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도 널리 읽힌 택리지는 수많은 이본(異本)을 낳았다. 원저자가 남긴 마지막 수정본은 없는데, 이본만 200여 종에 달하다 보니 이중환이 쓴 내용을 정확히 알기 어려웠다.

게다가 현대에 나온 택리지 번역본은 대부분 1912년 조선광문회가 펴낸 최남선 편집본을 저본으로 삼았다. 광문회본에는 다른 택리지 이본에는 없는 함흥차사 고사가 실리기도 했다.

이에 한문학자인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가 2012년 택리지 정본(定本)을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다.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에서 공부하는 연구자 9명과 함께 다양한 택리지를 조사하고 여러 판본을 대조하는 교감 작업을 한 뒤 원본에 가까운 정본을 만들어 우리말로 옮겼다.

6년간 작업한 끝에 '완역 정본 택리지'(휴머니스트 펴냄)를 출간한 역자들을 최근 대동문화연구원에서 만났다. 인터뷰에는 안대회 교수와 이승용 단국대 선임연구원, 대동문화연구원 김보성 선임연구원·김세호 연구원·임영걸 연구원·임영길 연구원, 성균관대 박사과정을 수료한 김경희 씨 등 7명이 참여했다.

연합뉴스

'완역 정본 택리지' 작업에 참여한 김세호 연구원(왼쪽부터), 김경희 씨, 안대회 교수, 이승용 선임연구원, 임영걸 연구원, 김보성 선임연구원, 임영길 연구원.



안 교수는 "숙원을 풀어서 개인적으로 원수를 갚은 느낌"이라고 웃으며 말한 뒤 "이본이 워낙 많아서 박사들과 같이할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놨다.

이승용 연구원은 "처음에 작업할 때는 쉽게 생각했는데, 택리지 이본이 늘어나면서 점점 힘들어졌다"며 "그래도 기획 당시에는 예상하지 못한 책을 많이 읽어서 좋았다"고 말했다.

역자들은 곳곳을 다니며 택리지 이본을 수집하고, 전문성을 갖추기 위해 각각 지역을 나눠 책을 분석했다.

김경희 씨는 "고려대는 1주일에 한 번만 책을 보여줘서 이본을 조사하기 힘들었다"며 "개인적으로 북한 지역을 맡았는데, 남한과 달리 지리 정보를 잘 모르다 보니 답답한 측면이 있었다"고 아쉬워했다.

역자들이 모두 놀란 사실은 택리지는 이본마다 내용이 매우 다르다는 점이다. 예컨대 필사자가 제멋대로 자기 지역 설명을 추가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슬쩍 빼버리기도 했다.

김세호 연구원은 "이본을 교감하다 보면 한숨이 절로 나왔다"며 "보통 교감을 하면 글자 한두 개 교정하거나 오류를 바로잡는 수준인데, 택리지는 아예 내용이 다른 이본이 발견되기도 했다"고 강조했다.

안 교수는 "택리지는 이본들도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며 "시대와 지역에 따라 택리지를 어떻게 보충하고 삭제했는지도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이본이 많다 보니 정본을 만드는 과정에서 수많은 주석을 달아야 했다. 예컨대 첫머리인 서론(序論)은 이자왈(李子曰)로 시작하는데, 일부 이본에는 이 문구가 없다. 또 팔도론(八道論)에서 '평안도'(平安道) 같은 지역명을 소제목으로 달지 않은 이본도 여럿이다.

안 교수는 "원문에 단 주석이 처음에 1만 개는 됐는데, 책에는 730여 개만 수록했다"며 "주석은 인문지리학이나 역사학을 하는 사람은 쉽게 엄두를 내지 못하는 작업이고, 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해서 줄이고 줄이느라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역자들이 바라본 이중환은 어떤 인물일까. 그가 택리지라는 불후의 저작을 남긴 이유는 무엇일까.

이승용 연구원은 "이중환은 잘나가는 관료에서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고, 나중에는 끼니를 걱정해야 했던 인물"이라며 "실존적 문제를 고민한 그는 택리지에 사대부가 살고 싶은 유토피아가 어디인가를 기술하고자 했다"고 주장했다.

이중환은 실제로 24세에 문과에 급제했으나 30대 중반부터는 당쟁으로 인해 관직에서 완전히 밀려났다. 그는 남인 중에서도 강경파여서 정치 관점이 분명하고 타협적이지 않았다.

안 교수는 "많은 남인도 이중환이라는 인물과 어울리기를 꺼렸던 것 같다"며 "연민의 감정이 들기도 하는데, 인생에서 뼈저린 체험을 했기 때문에 남들이 감히 쓰지 못한 책을 집필했다는 생각도 든다"고 추론했다.

임영걸 연구원은 "개인적으로 택리지에 적힌 지리적 정보보다 이중환의 저술 의식에 관심이 많았다"며 "관에서 편찬하는 지리지는 통치에 도움을 주기 위해 제작하는데, 택리지는 민간에서 필요에 의해 쓴 책이라는 점이 특징"이라고 역설했다.

그는 "원래 택리지 제목이 사대부가 살 만한 곳을 뜻하는 '사대부가거처'(士大夫可居處)"라며 "실학의 시대가 오기 전에는 택리지를 지리지가 아니라 야사(野史)로 소비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김보성 연구원이 "인간은 '왕따'였으나, 책은 베스트셀러였다"고 하자 안 교수는 택리지가 조선시대에 인기를 끈 이유로 풍부한 여행 정보를 꼽았다.

그는 "택리지 분량이 그리 많지 않은데, 전국에 있는 명승과 누각·정자에 대한 묘사를 잘했다"며 "일종의 여행 가이드북처럼 사용했기에 널리 읽힌 것"이라고 말했다.

역자들은 지금도 각 지역을 홍보할 때 택리지를 인용한다면서 정본 출간을 계기로 책이 재조명되길 희망한다고 입을 모았다.

"조선시대에 택리지만큼 반응이 선풍적이었던 책은 없습니다. 다시 한번 택리지 붐이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psh59@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