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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퀄컴의 K-프로젝트…“대통령 만나 공정위 조사 막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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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커버스토리

퀄컴의 K-프로젝트 내부문서 단독입수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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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5년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조그만 벤처기업으로 시작한 퀄컴은 전세계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통신 모뎀칩 시장을 장악한 절대 강자다. 퀄컴은 휴대전화 제조업체에 비싼 로열티를 매기고 경쟁 부품업체에는 기술 제공 의무를 거부하는 등 ‘특허갑질’을 일삼았다. 공정거래위원회는 2009년 1차 과징금 부과에 이어 2014년 다시 퀄컴의 시장지배적 지위 남용에 대한 조사에 착수하며 퀄컴을 압박했다. 퀄컴 본사와 퀄컴코리아는 공정위의 조사를 무마하기 위해 ‘케이(K)-프로젝트’를 기획하는 등 박근혜 전 대통령을 비롯한 청와대, 정부, 국회 주요 관계자들에게 접근하려는 노력을 전방위적으로 펼쳤다. 글로벌 기업의 치밀하고 광범위했던, 하지만 ‘1%’가 부족했던 로비 계획을 <한겨레>가 퀄컴 내부 문서를 단독 입수해 재구성했다.



2016년 12월21일 공정거래위원회는 세계적 정보통신기술 업체인 퀄컴에 1조300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하고 특허권 제공 방식을 바꾸라는 시정명령을 내렸다. 특허기술을 무기로 휴대전화 제조업체 등에 부당한 라이선스 계약을 강요하는 ‘특허갑질’을 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박근혜 대통령을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자는 ‘송박영신’의 희망을 노래했던 그때, 퀄컴의 수뇌부들은 커다란 좌절감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공정위의 과징금 결정을 막기 위해 펼쳤던 공식·비공식적 시도들이 수포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공정위는 이에 앞서 2009년 7월 이동통신 특허기술을 보유한 퀄컴이 시장지배적 지위를 남용했다며 과징금 2700억원을 부과했다. 공정위의 ‘매운맛’을 본 퀄컴이 이때부터 한국 정부에 공을 들이기 시작했다고 업계 관계자들은 얘기한다. 퀄컴은 삼성과 엘지(LG) 등 휴대전화 제조업체에 지속적으로 핵심 부품과 특허기술을 팔아야 했기에 불공정 거래를 문제 삼는 한국 공정위 조사는 ‘위험 요소’였다. 더구나 공정위는 2014년 퀄컴의 불공정거래 행위에 대한 새로운 조사에 착수했다.

<한겨레>는 김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을 통해 2012년 2월부터 2016년 10월까지의 퀄컴 내부문서들을 입수했다. 퀄컴을 향한 공정위의 칼날을 무디게 하려고 전방위적 로비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 공을 들인 기록들이다. 글로벌 기업답게 그들의 계획은 ‘치밀’하고 광범위했지만 결국 ‘실패한 로비’로 끝나고 말았다. 문서를 바탕으로 퀄컴의 ‘액션플랜’을 재구성했다.

제이컵스 회장, ‘위원장’ 돼 대통령 만나다

모니크 로드리게스 퀄컴 대관담당 상무는 2012년 2월17일, 폴 제이컵스 퀄컴 회장의 한미재계회의(USKBC) 위원장 취임 건을 상의하는 내부문서를 작성해 돌렸다. 한미재계회의는 전국경제인연합회와 미국 상공회의소가 공동 운영하는 양국 기업 간 협의체다. 로드리게스 상무는 “한덕수 주미대사가 ‘퀄컴이 한국에서 갖고 있는 위대한 이야기’(the great story Qualcomm has in Korea)를 거론하며 제이컵스 회장에게 위원장직을 제안했다”고 적었다.

문서에서는 제이컵스 회장이 한미재계회의 위원장직을 맡을 경우의 장단점을 분석했다. 우선 “한국의 다음 대통령뿐만 아니라 인기 없는 이명박 대통령을 올여름 서울에서 열리는 총회에서 만날 수 있다”며 “한국 대통령과 의례적이지만 유용하게 접촉하고 대면할 기회가 생기는 게 장점”이라고 분석했다. 한국과 미국, 또 다른 나라의 기자들이 퀄컴 관련 오래된 파일을 열어 (과징금 부과 관련) 기사를 쓸 것이고, 퀄컴-공정위 갈등이나 한국에서 가져가는 퀄컴의 수익을 강조하는 기사가 나올 것이라는 점 등은 단점으로 꼽혔다.

퀄컴은 공격적인 행보를 택했다. 7개월 뒤인 2012년 9월, 제이컵스 회장은 한미재계회의 미국 쪽 위원장에 추대되고 이를 수락했다. 그리고 그들 말대로 “한국 대통령과의 유용한 접촉”을 시작한다. 한국의 18대 대선이 끝난 다음날인 2012년 12월20일, 숀 머피 부사장은 “우리는 이제 박 여사(Madame Park)가 다음 대통령이 된 사실을 알았다. 우리는 인수위원회, 궁극적으로는 정부 내각과 관계를 맺기 위한 정치전략에 대해 대화해야 한다”며 “박 당선자와 매우 가까운 ‘인수위 핵심 책임자(key transition advisors)’나 ‘비공식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사람’(informal influencers)이 누구인지, 언제 접촉할 수 있는지 알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퀄컴이 목표로 했던 한국 대통령과의 만남은 2013년 5월 박 대통령의 첫 미국 방문 때 성사됐다. 로드리게스 상무는 2013년 5월14일, 제이컵스 회장이 한미재계회의 위원장 자격으로 워싱턴에서 박 대통령을 만난 장면을 상세히 적었다. 한미재계회의가 주관한 오찬간담회 자리에서 “제이컵스 회장이 박 대통령을 소개”했고 “박 대통령은 식사 시간 내내 제이컵스 회장에게 전념(undivided attention)”했다는 것이다. 다시 오찬에는 방미 수행단으로 참여한 이건희·정몽구·구본무 등 재벌 총수들과 중소기업 대표들도 함께했다. 그는 “한국의 언론 보도도 매우 긍정적”이라며 안도했다. 2014년 1월 스위스에서 열린 다보스포럼에서 박 대통령과 제이컵스 회장은 다시 만났다. 박 대통령은 글로벌 기업들의 최고경영자를 연이어 만나는 자리에서 제이컵스 회장에게 2013년 5월 방미 당시 오찬간담회에 대해 “당시 한국 사정이 북한의 도발 등으로 우려가 있었는데 한국 경제에 신뢰를 주고, 외국 투자자들도 안심시키는 좋은 계기가 됐다고 생각한다”고 사의를 표한다.

최고권력자와의 소통채널을 구축하려는 이런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공정위는 2014년 8월 퀄컴의 시장지배적 지위 남용 행위 조사에 착수했다. 자신들의 특허권을 앞세워 휴대폰 제조업체들에 특허 사용료를 과다책정하고, 경쟁회사들에는 특허기술 제공을 거부한 행위에 관한 것이었다.

‘대통령 만날 기회’ 위해 제이컵스 회장
2012년 한미재계회의 위원장직 맡아
박근혜 대통령 당선 직후에는
“비공식적 영향력 인물 알아내야”

2014년 공정위 조사 착수하자
“TPP, 방미에 부정적 영향 강조해야”
“테러 당한 리퍼트 대사 활용을”
1천억원 벤처 투자 계획도 발표


언론 보도를 통해 공정위의 조사 사실이 알려진 뒤인 2015년 3월11일, 로드리게스 상무는 한국 정부를 상대로 한 단기·중장기 계획을 사내에 회람시켰다. 그해 3~4월에 당장 시행할 단기 계획으로 “안호영 주미대사부터 시작해 한국 정부와 사적인 대화를 시작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한국 정부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후속인 티피피(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등에서 미국 정부의 입장이 장밋빛이 아니라는 점” 등을 상기시키기로 했다. 또 “박 대통령의 방미가 10월에 예상되는데 환영받지 못할 많은 부정적 결과가 우려된다는 점도 강조해야 한다”고 했다. 티피피는 미국이 주도하는 아시아·태평양 지역 공동체로 박근혜 정부가 참여를 희망하고 있었다. 외교·경제적 현안을 앞세워 한국 정부를 압박하려는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문서에는 서울에서 테러를 당해 한국민들에게 미안함의 대상이 된 마크 리퍼트 당시 주한 미국대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자는 방안도 담겼다. “최근 피습으로 앞으로 (대사 잔여 임기인) 20여개월 동안은 ‘언터처블’(untouchable, 건드릴 수 없는)이 됐다”는 것이다. 장기 계획으로는 “퀄컴코리아 대관팀과 협업해서 국회와 관련 상임위원회 핵심인물과의 관계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했다. “박 대통령의 레임덕 기간에 국회의 영향력이 커지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비슷한 시기에 대니얼 류 퀄컴코리아 이사는 로비 계획에 제이컵스 회장과 박 대통령의 면담 일정이 누락된 점을 지적했다. “비록 박 대통령의 인기가 식고 있지만 박 대통령을 만나는 게 중요하다”며 “박 대통령의 힘이 점점 빠지겠지만 한국 정치 시스템에서 그는 우리를 위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믿음직하고 유일한 원천”이라고 강조했다. 박 대통령과의 면담을 위해서는 “벤처나 연구개발 투자 같은 의제를 가지고 가면 환영받을 것”이라는 아이디어도 냈다. 하지만 이후 박 대통령과의 ‘비공식적 만남’은 성사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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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범·조신·최경환을 움직여라

류 이사의 조언대로 퀄컴은 투자 계획을 앞세워 두 사람의 면담 일정을 잡으려는 계획에 착수한다. 김영훈 퀄컴코리아 부사장은 2015년 6월14일 퀄컴벤처스(퀄컴의 벤처투자 자회사)에 투자 계획안을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다. 퀄컴의 벤처 투자는 박 대통령과 제이컵스 회장의 면담을 유인할 수 있는 ‘미끼’였다. 제이컵스 회장은 약 보름 뒤 1박2일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했고 대관팀의 조언대로 한국의 신생 벤처기업에 1000억원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2개월 뒤인 2015년 8월, 퀄컴은 ‘케이-프로젝트 제안’(Idea proposal for K Project)이라는 문서를 작성한다. 이 문서에는 ‘이해당사자 지도’(Stakeholder Map for K)라는 이름으로 청와대, 기획재정부·미래창조과학부·특허청 등의 정부, 국회, 언론, 학계 등 공정위 조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관들의 관계도가 그려져 있다.

또 ‘이해당사자 분석’이라는 제목의 문서에서는 청와대·정부·국회·학계의 중요 로비 대상자의 개인적인 성향과 그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인맥 등을 정리했다. 안종범 청와대 경제수석을 “퀄컴 문제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핵심 영향력자’(key influencer)”로 지목했고, 제이컵스 회장과 면담한 적이 있는 조신 청와대 미래전략수석은 안종범 수석에게 퀄컴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중개인으로 꼽았다.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박근혜 대통령의 잘 알려진 오른팔” “안종범 수석에게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적었다. 제이컵스 회장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만난 적이 있는 최양희 미래창조과학부 장관도 매우 중요한 인물로 꼽혔지만 “최 장관이 본인의 성정상 퀄컴 일에 연루되는 걸 꺼린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분석했다.

이들에게 전달할 메시지와 달성해야 할 목적도 명시됐다. 안종범·조신 수석, 최경환 부총리에 대한 로비 목적은 “공정위원장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퀄컴 사건 결정을 늦추게 하는 것”이었다. 이들에게 전달할 ‘메시지’, 즉 이들을 압박할 논리는 △지식재산권 보호는 새로운 성장산업(5G, 사물인터넷, 스마트자동차)을 발전시키기 위한 전제조건이며 (퀄컴에 과징금을 매길 경우)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무역관계 긴장이 생길 수 있으며 △10월에 예정된 박 대통령의 미국 방문에 부정적 영향이 있고 △아이티 산업의 세계적 충격이 우려된다는 내용이었다.

최양희 장관에게는 “세계적인 혁신기업과 함께하는 지식재산권 보호 정책이 어떻게 한국의 5G, 사물인터넷, 스마트자동차 산업을 발전시킬지를 보여줘야 한다”고 했다. 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에게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문제를 지렛대로 삼아 왜 퀄컴 문제를 부드럽게 해결해야 하는지 인식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호영 주미대사에게는 “지식재산권 보호 정책이 한-미 양국의 우호 관계를 더욱 강화할 것”을 보여주고 “한국의 규제로 미국 기업들이 유감을 나타낼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퀄컴은 또 교수 등 학계를 동원해 관련 세미나를 열거나 언론사 기고를 통해 공정위를 압박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공정위를 감독하는 국회 정무위원회와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과 간사들도 접촉해야 할 중요 명단에 올렸다. 정계·관계·학계·언론계를 아우르는 전방위적 로비를 통해 공정위의 조사를 무력화하려는 ‘큰 그림’이었다.



공정위 조사 무마하는 ‘연기-축소-합의’ 전략

이 무렵 퀄컴의 내부문서는 공정위 조사 무력화를 위한 기획을 ‘연기(Delay)-축소(Narrow)-합의(Settle) 전략’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공정위 조사 실무팀이 조사를 마친 뒤 위원회에 제재를 요구하는 ‘심사보고서’ 작성을 ‘연기’하고, 조사 범위를 ‘축소’하며, 결국엔 본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합의’를 끌어내겠다는 계획이었다.

2015년 10월부터는 공정위의 심사보고서 작성을 방해하려는 ‘행동 계획’(Action Plan)이 공유됐다. 먼저 로비 대상에게 전달할 메시지를 더욱 명확히 했다. “공정위가 짧은 기간 동안 충분한 분석과 증거 없이 결론을 내릴 것으로 의심”된다며 “공정위 심사보고서 발표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게 핵심논리였다. 또 “공정위의 퀄컴 조사가 삼성전자 등 국내 기업을 위한 보호무역주의”라는 논리도 추가됐다. 공정위 심사보고서 발표를 늦추기 위한 핵심 영향력자에 청와대 이병기 비서실장과 현기환 정무수석도 포함했다. 그러나 공정위는 2015년 11월, 조사를 마치고 공정거래법 위반 사실을 적시한 심사보고서를 퀄컴 본사에 전달했다. 과징금 부과까지 이제 위원회 심의와 의결만 남게 된 것이다.

해가 바뀌고 다급해진 퀄컴은 최경환 전 부총리에게 주목했다. 2016년 1월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다보스포럼에 참석하는 최 전 부총리를 제이컵스 회장이 접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몰리 개빈 퀄컴 부사장은 “박 대통령 최측근이고 현 정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장관이었다”며 “그가 총선을 위해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여전히 정부와 여당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이라고 했다. 이어 “그의 다보스포럼 참석을 늦게 알긴 했지만 한국 정부 내 최고위급과 대화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적었다.

미국 의회 나가 “공정위 조사, 한-미 FTA 위반”

퀄컴은 미국 본토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거론하며 한국 정부를 압박하기도 했다. 머피 부사장은 2016년 3월3일 미국 상원이 주최한 ‘자유무역협정 이행: 과거 사례가 주는 교훈’이라는 제목의 공청회에 출석해 “퀄컴이 공정위 조사 과정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보장하고 있는 사건기록 접근권과 반대 신문권을 보장받지 못했다”며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발효되긴 했지만 공정위는 외국 기업과 관련된 규제의 수준을 높이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자동차산업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 조항을 위반하면 철폐한 관세를 복원하는 ‘스냅백’ 조항을 다른 산업에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채찍’을 휘두른 뒤엔 ‘당근’도 빼놓지 않았다. 2016년 5월30일, 퀄컴은 한국 벤처기업에 투자하겠다고 약속한 1000억원 중 570억원을 ‘성장사다리펀드’에 투자하고 투자 운용 기관으로 ‘컴퍼니케이파트너스’를 선정했다. 성장사다리펀드는 정책금융기관과 민간자본의 투자를 유인하는 방식으로 중소·벤처기업을 지원해 ‘창조경제’를 실현하겠다는 박근혜 정부의 주요 사업이었다. 컴퍼니케이파트너스는 박 대통령의 이종사촌 일가가 소유하고 있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특혜 의혹이 일기도 했다.

2015년 ‘K-프로젝트’ 문서 작성
청와대·정부 등 관계자 ‘지도’ 그려
“공정위 조사 연기-축소-합의 전략”

2016년 한-미 FTA 거론 정부 압박
“청와대가 큰 관심 갖고 있다 했다”
결국 과징금 1조원 부과받고 수포로

같은 시기 삼성은 ‘최순실 존재’ 확인
1년 동안 정유라에게 돈 78억원 사용
퀄컴은 ‘비공식 영향력 인물’ 못 찾아


퀄컴의 ‘노력’ 덕분인지 2016년 8월9일,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 외국인투자옴부즈만이 퀄컴코리아 사무실을 방문했다. 김승수 퀄컴코리아 홍보전무는 옴부즈만이 방문하는 이유로 “힘겹게 일하고 있는 외국 기업의 상태를 체크하라는 고위층(high levels)의 지시를 받은 것 같다”고 보고했다. 또 “옴부즈만의 임기가 ‘박 여사’와 함께 내년에 끝나는데 잡음 없이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는 게 그의 관심사항”이라고 적었다. 다음날 옴부즈만을 면담한 이태원 퀄컴코리아 사장은 “청와대가 퀄컴 건에 매우 큰 관심을 갖고 있다”는 옴부즈만의 발언을 전했다. 또 “청와대 경제수석이 그를 보냈고 돌아가서 보고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달 뒤인 2016년 9월8일, 이태원 사장은 ‘PJ(폴 제이컵스) 서울 방문 보고’ 문서를 ‘특별한 비밀’이라는 제목으로 사내에 회람시켰다. 이 사장은 “제이컵스 회장이 지난주 한국 장관들과 국회의장, 청와대 수석을 만났고 그들 모두 성장사다리펀드를 포함한 한국 스타트업을 위한 퀄컴의 벤처 투자를 언급했다”며 “그들이 우리의 벤처 지원에 감사했고 지속적인 지원을 요구했다”고 적었다. 그러나 “우리는 공정위 사건을 중심으로 토론했지만 한국 공직자들은 벤처 투자 문제를 주요 화제로 삼았다”고 했다. 제이컵스 회장이 만난 한국의 ‘실력자’들이 퀄컴-공정위 사건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곳저곳에서 좋은 신호를 읽지 못한 제이컵스 회장은 2016년 10월1일, 주형환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 현대원 청와대 미래전략수석에게 편지를 보냈다. 제이컵스 회장은 “최근 한국 방문 기간에 만날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고 운을 뗀 뒤 “공정위의 퀄컴 조사가 전세계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고 건전한 독점금지 원칙에도 위배되며 증거나 경제이론으로 뒷받침되지도 않는다”고 강도 높게 비난했다. 이어 제이컵스 회장은 공정위의 제재가 실현되면 “퀄컴은 한국에서 사업하는 방법을 재평가할 계획”이라고 압박성 발언을 덧붙였다.

퀄컴은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지만 ‘케이-프로젝트’는 2016년 12월21일 공정위의 1조300억원 과징금 부과와 함께 막을 내렸다.

퀄컴이 최순실을 알았더라면

퀄컴이 공정위 조사를 무마하려고 세운 로비 계획이 실제로 어느 정도까지 시행되고 실현됐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2012년 초 퀄컴 내부문서에서 제이컵스 회장에게 한미재계회의 위원장직을 맡으라고 권유한 사람으로 적시된 한덕수 전 주미대사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한미재계회의 운영에 대해 대사관에서 관여를 한 적이 없고 제이컵스 회장을 개인적으로 만난 일도 없다. (그런 내용은) 좀 잘못된 것 같다”고 말했다. 조신 전 수석은 박 대통령을 만나게 해달라는 제이컵스 회장의 제안을 거절했다고 <한겨레>에 밝혔다. 조 전 수석은 “공정위 현안이 걸려 있는 상황이라 (면담이)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다”며 “나까지 안 만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공정위 건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걸고 청와대 연풍문(방문자 면담 장소)에서 만났다”고 밝혔다. 조 전 수석은 “제이컵스 회장은 실제로 공정위 건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안종범 수석에게 이를 전한 적도 없다. 전할 필요를 못 느꼈다”고 말했다.

퀄컴의 구상은 주도면밀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다. 2016년부터 박근혜 정권이 급속히 레임덕 현상을 보이고, 하반기부터는 아예 권력 진공상태에 빠진 것도 퀄컴이 로비 타깃을 제대로 설정하기 어려운 환경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특히 퀄컴은 박 대통령 당선 직후 찾아내려고 했던 ‘비공식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사람’ 탐색에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삼성이 2015년 7월 ‘비선실세’ 최순실의 존재를 확인한 것과 대비된다. 삼성은 2015년 9월부터 약 1년 동안 최씨의 딸 정유라씨를 위해 말 구입과 훈련 비용 지원 명목으로 78억원에 가까운 돈을 썼다. 퀄컴이 케이 프로젝트의 그림을 그리고 부산하게 움직이던 그 시기였다. 퀄컴의 로비 계획은 글로벌 기업답게 ‘스케일 있게’ 추진했지만, 비선실세가 좌지우지하던 한국에서는 ‘1%’가 부족했던 셈이다.

김해영 의원은 “미국 거대 기업이 한-미 관계를 볼모로 한국 정부를 굴복시킬 구상을 했다는 점에서 퀄컴의 로비 계획은 매우 불순하다”고 지적하고 “결국 퀄컴의 로비는 실패로 끝났지만, 두번 다시 이러한 시도가 용납돼서는 안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퀄컴코리아 관계자는 “퀄컴코리아에는 법무팀이 없어서 본사에서 다뤘던 이슈였다. 우리가 왈가왈부 얘기할 수 없는 상황이며 공식적으로 할 말이 없다”면서도 “전방위적 로비를 펼쳤는데 (과징금) 1조300억원을 부과받았다는 것이 말이 되는지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김태규 기자 dokbul@hani.co.kr




공정위 시정명령에 퀄컴 핵심 사업모델 흔들려

“한국은 퀄컴을 크게 도왔지만, 퀄컴에 카운터펀치를 날린 것도 한국이다. 그것도 두차례나.”

한 통신업계 전직 임원의 말이다. 이 말처럼 한국은 미국 반도체 회사 퀄컴에 ‘사업적 은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2700억원과 1조원의 과징금을 매기고, 그보다 훨씬 예민한 ‘특허권 조정 시정명령’을 내린 나라이기도 하다.

퀄컴은 이동통신 관련 특허기술과 모뎀 칩세트를 판매하는 글로벌 정보통신기업이다. 1990년대 말 작은 벤처회사 퀄컴이 디지털 통신기술의 일종인 시디엠에이(CDMA) 기술을 개발했을 때, 이를 본격적으로 도입한 나라가 한국이었다. 당시 티디엠에이(TDMA) 등 기존 통신기술이 있었는데 한국은 과감하게 시디엠에이 기술에 막대한 투자를 했고, 이를 이용해 고품질의 효율적 통신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퀄컴은 이를 계기로 통신 시장에서 성공의 길에 들어섰다. 퀄컴은 지난해 기준 매출 232억달러, 세계 7위 반도체 회사로 성장했다.

2009년 한국 공정거래위원회는 퀄컴에 첫 제재의 칼을 들이댔다. 퀄컴이 시장지배적 지위를 남용해 기업에 따라 로열티를 차별하고 조건부 리베이트를 제공했다며 2700억원의 과징금과 ‘로열티를 차별하지 말라’는 시정명령을 내린 것이다. 퀄컴은 이에 불복해 2700억원 반환 소송을 하고, 현재 대법원에 5년째 계류 중이다.

경쟁 회사들에 특허기술 제공 거부
공정위 조사 끝 1조원대 과징금에
특허권 제공 방식 시정하라고 명령
“변호사비만 수백억원 쓸 만큼 치명적”


2016년 12월 공정위는 ‘2009년 제재’보다 훨씬 강력한 제재를 한다. 1조원이라는 역대 최대 과징금과 함께 퀄컴의 특허권 제공 방식에 대한 시정명령을 한 것이다. 이는 퀄컴의 핵심 사업 모델을 건드린 매우 중요한 제재였다.

공정위가 문제 삼은 건 퀄컴의 특허권 사업 방식이다. 공정위 조사 결과를 보면, 퀄컴은 무선통신에 반드시 필요한 ‘표준필수특허’(SEP)를 갖고 있는데 이를 인정받기 위해 ‘공정하고 합리적이고 비차별적으로 라이선싱하겠다’는 프랜드(FRAND) 확약을 수용했다. 특허권 사용을 원하는 기업들에 차별 없이 특허권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하고 퀄컴의 기술을 표준특허로 인정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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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퀄컴은 인텔, 미디어텍 등 모뎀 칩세트를 만드는 경쟁회사들의 특허권 사용 요구에 응하지 않은 채 단말기(스마트폰) 제조사들에만 특허권을 제공하고 로열티를 받아왔다. 비싸야 50달러 정도인 칩세트에 로열티를 부과하는 것보다 500달러, 1000달러에 이르는 단말기에 로열티를 부과하는 게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비유하자면 땅 주인인 퀄컴이 땅을 빌려주고 그 대가를 ‘월세’로 받는 게 아니라 땅에서 나오는 ‘농산물’마다 받는 격”이라고 설명했다.

퀄컴은 전세계에 출고되는 모든 스마트폰에 로열티를 부과하는 방식으로 천문학적 이익을 창출해왔다. 지난해 퀄컴의 특허권 사업 매출은 64억달러로 전체 매출(232억달러)의 27.2%에 그치지만, 영업이익은 51억달러로 전체 영업이익(78억달러)의 65.4%를 차지했다.

공정위의 시정명령은 국내 업체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 애플과 화웨이, 인텔, 미디어텍 등 글로벌 업체에 모두 적용된다. 글로벌 통신 생태계가 흔들리게 될 수 있는 것이다. 한국 공정위 결정을 토대로 미국 연방거래위원회가 퀄컴을 고소하고, 애플은 퀄컴에 로열티 납부를 중지하는 등 여파가 상당하다. 퀄컴의 한 관계자는 “회사 내부적으로 시정명령만은 피해야 한다고 보고 이를 위해 노력했다. 변호사 비용만 수백억원 쓴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러나 퀄컴의 노력은 결국 실패했고 공정위는 과징금 부과와 시정명령을 결정했다. 퀄컴은 지난해 과징금 취소 행정소송을 제기해 현재 진행 중이다. 시정명령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도 제기했지만, 지난해 말 대법원에서 기각됐다.

최현준 기자 hao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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