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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만물상] 국어 '불(火)수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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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대입 수능시험제도가 도입된 이래 수험생들은 해마다 수능 난이도에 울고 웃었다. 너무 어려우면 '불(火)수능', 쉬우면 '물(水)수능'으로 불렀다. 2001년 수능은 특히 국어와 수학이 어려웠다. 1교시 국어 시험이 끝나자마자 짐 싸들고 고사장을 뛰쳐나간 중도 포기자가 속출했다. 정부가 '특기 하나만 있으면 대학 갈 수 있다'며 쉬운 수능을 약속한 이른바 '이해찬 1세대'가 당시 고3이었다. 학부모, 수험생들이 들끓자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쉽게 출제한다는 정부 약속을 믿은 학부모, 학생들이 충격을 받아 매우 유감스럽다"고 사과까지 했다.

▶1997, 2008, 2010년에 이어 그제 치러진 수능도 불수능 대열에 합류했다. 국어·수학·영어 세 과목 모두가 어려웠다고 한다. 특히 동·서양의 우주론과 만유인력의 법칙, 질점(質點) 등을 버무려 낸 국어 31번이 '킬러(killer) 문제'였다. 주변에 '질점' 개념을 아는 이가 별로 없었다. 백과사전에는 '물체의 질량이 총집결한 것으로 간주되는 점'이라는데 여전히 아리송했다. 작년 수능 국어에서도 거시경제 전반에 대한 이해를 요구하는 '환율 오버슈팅' 문제가 나와 수험생들을 당황케 했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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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문항을 묻는 수능 국어 문제지는 16쪽이다. 5분 안에 한쪽을 풀어야 하는데 보통 사람들은 지문을 읽기에도 바쁜 시간이다. 과거 수능 국어 문제를 풀어봤다는 김도연 포스텍 총장은 "문제를 배배 꼬아놓았다. 분노가 치민다"고 했었다. 그러나 현행 입시제도에서 대학이 우수한 학생을 뽑으려면 변별력이 높은 '킬러 문제' 출제가 불가피한 측면도 있는 게 사실이다.

▶어렵기로 둘째 가라면 서럽다는 게 일본 도쿄대 입시다. 본고사가 있던 1980년대 이전 서울대 준비생 상당수가 도쿄대 기출 문제를 구해 공부했지만 "너무 어렵다"며 두 손 드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도쿄대 입시는 지금도 거의 전 문항이 '킬러' 수준이라고 한다.

▶올해 프랑스 바칼로레아에선 '모든 진리는 결정적인가' '정의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불의를 경험하는 것이 필요한가' 같은 문제가 출제됐다. 독일 대학 시험에선 시와 소설 등에서 제시문을 발췌해 '분석하고 당신의 생각을 써라'는 주관식 문제를 출제한다. 그런데 우리는 교사가 교실에서 지문을 읽어가며 일일이 해석해주고, 학생들은 고사장에서 정답 찍기를 한다. AI 혁명 시대에 갖춰야 할 창의성 키우기 하고는 거리가 너무 멀다. 이래서야 우리 젊은이들이 나중에 다른 나라 인재들과 겨룰 수 있겠는지 걱정이다.

[박은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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