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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기자의 시각] "직원 내보내고 죄인 된 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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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오로라 산업2부 기자


"힘들다고 얘기하면 정부가 들어주나요?"

내년 최저임금 10.9% 인상을 앞두고 감원(減員) 칼바람이 불고 있는 중소기업 현장을 취재하면서 기자가 가장 많이 들은 말이다. 현장에서 만난 중소기업 사장은 대부분 말수가 적었다. 할 말이 없는 게 아니라 말해도 소용이 없다는 무력감이 더 커 보였다. 이들은 올 7월 내년도 최저임금 인상안이 결정된 후 한때 광화문 앞을 가득 채우며 반대 목소리를 높였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올해가 한 달 반쯤 남은 지금까지 정부가 최저임금과 관련한 이렇다 할 대책을 내놓지 않자, 들끓던 울분이 포기와 침묵으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지난 7일 경기도 남양주의 한 세탁 업체 공장에서 만난 50대 A 사장에게서는 파스 냄새가 났다. 올해 직원 40명 중 5명을 내보내며 사장 부부가 직접 공장 일을 하다 보니 어깨와 허리 통증이 심해졌다고 했다. 공장에서는 세 사람이 해야 될 작업을 두 사람이 하고 있었다. A 사장은 "공장 일을 끝내고서도 저녁이나 밤에 직접 빨랫감을 서울에 있는 호텔로 날라야 한다"고 말했다.

월 300만원을 받는 운전기사들의 임금이 내년 1월 최저임금 인상으로 다시 오르게 되자 기사들을 내보낸 탓이다. A 사장은 "잠을 줄여가며 일해도 사업 규모는 계속 줄고 내년에도 직원을 내보내야 한다"면서도 "힘든 얘기를 해봤자 들어주는 사람이 없으니 더 이상 말하기가 싫다"고 했다.

희망이 없으니 아예 한국 공장을 포기하고 해외로 나가겠다는 중소기업인도 부쩍 많아졌다. 한 반도체 부품 기업 사장은 "차례로 직원을 줄이고 3년 안에 베트남으로 공장을 옮기겠다"며 "정부 대책을 기다리기보다 해외로 탈출하는 게 더 빠를 것"이라고 자조(自嘲)했다. 그는 "인건비 상승으로 내보낼 수밖에 없었던 직원들의 울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죄인이 된 심정"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한 중소기업중앙회 관계자는 "한동안 중기중앙회로 빗발치던 '힘들다'는 원성이 이제는 일주일에 한두 건으로 줄었다"며 "정부가 전혀 바뀔 조짐이 없으니까 중소기업인들이 포기한 것"이라고 했다. "이런 침묵이 정부에 최저임금 인상안이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으로 인식될까 봐 우려스럽다"는 말도 덧붙였다.

정부는 '모두가 함께 잘살자'는 취지로 최저임금 인상을 결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장에서 만난 중소기업인들은 '모두 함께 힘들 뿐'이라고 항변했다. 자르고 싶지 않은 직원을 잘라야 하고, 일자리는 계속 줄어들기만 한다는 것이다.

한 중소기업 사장은 "우리가 조용해지니 정부는 참 편하겠다"고 했다. 감원과 폐업에 내몰린 이들의 체념을 정부는 기뻐하고 있을까. 지금의 침묵이 앞으로 닥칠 일자리 참사의 전조(前兆)인 듯해 착잡하다.

[오로라 산업2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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