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3.29 (금)

[백영옥의 말과 글] [73] 함께 견디는 삶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조선일보

백영옥 소설가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보다가 인상적인 대사(臺詞)를 발견했다. 신인 때 잘나가다가 망한 여배우가 천재 소리를 듣다가 데뷔도 못한 감독과 나누는 이야기였는데, 그녀의 앞에는 한때 잘나가다 망한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제약회사 이사, 은행 부행장, 자동차 연구소 실장을 하다가 각각 백수, 미꾸라지 수입업자, 모텔에 수건 대는 업자로 전락한 쉰 살의 아저씨들 말이다. 망한 사람 앞에 두고 망해서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열변을 토하는 감독에게 배우가 말한다.

"인간은요. 평생을 망가질까봐 두려워하면서 살아요. 전 그랬던 것 같아요. 처음엔 감독님이 망해서 정말 좋았는데, 망한 감독님이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더 좋았어요. 망해도 괜찮은 거구나.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망가져도 행복할 수 있구나. 안심이 됐어요…. 전혀 불행해 보이지가 않아요. 절대로. 그래서 좋아요. 날 안심시켜줘서."

얼마 전,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이란 책을 낸 프로파일러 권일용을 만났다. 책에는 네 살 아이를 죽여 토막 살해한 남자와의 면담 중 백반을 주문해 함께 먹는 장면이 나온다. '2001년 6월 초여름 조현길을 만난 날 이후, 자신이 다른 세계로 들어와버렸다'는 문장을 읽다가 잠시 멈췄다. 괴물의 심연을 매번 들여다봐야 하는 프로파일러의 인간적 고통이 느껴져서였다. 그는 가족에게조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견딜 수 있었던 건 동료들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나만 힘든 게 아니라, 다 같이 힘든 사람들이 소주를 나눠 마시며 고통을 n분의 1로 나누었기에 그 세월이 견뎌졌다는 것이다.

성공은 희귀하고 실패는 흔하다. 망한 사람을 보며 ‘나만 그런 건 아니구나’라고 안심하는 우리의 마음속에는 얼마나 여린 아이가 울고 있을까. 인간이 위로받을 때는 나와 같은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볼 때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타인의 고통과 비교하며 자신의 ‘다행’을 인식하는 게 사람이기 때문이다. 혼자 울면 외롭지만 함께 울면 견뎌지는 게 삶이다.

[백영옥 소설가]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