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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아무튼, 주말] '영웅문' 아버지, '아이언맨' 아버지를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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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魚友야담]

조선일보

어수웅·주말뉴스부장


중학교 기술시간에 단체로 '사랑의 매'를 맞은 적이 있습니다. 저 때문이었습니다. 무협지를 교과서로 가리고 읽다가 들켰죠. 전체주의를 신봉했던 선생님은 반 70명 전원의 엉덩이를 대걸레 자루로 다스렸습니다. 그전 시간에도 다른 친구가 같은 '범죄'로 주의를 받았거든요. 사실 '범인'은 저나 그 친구가 아니라, 무협소설 작가였을 겁니다. 책 제목 '영웅문', 작가는 보름쯤 전 세상을 떠난 중국의 진융(金庸·1924~2018)입니다.

12일에는 태평양 건너 미국 작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스탠 리(1922~2018). 세상 거의 모든 수퍼 히어로의 아버지. 스파이더맨, 엑스맨, 아이언맨, 헐크, 어벤져스, 판타스틱 포, 데어데블, 닥터 스트레인지, 블랙팬서를 태어나게 한. 2018년을 여러 의미로 규정할 수 있겠지만, 기자에게는 진융과 스탠 리가 하늘로 떠난 해이기도 합니다. 누군가 이렇게 적었더군요. "20세기에 각각 동양과 서양의 영웅담을 써서 21세기 청중까지 들뜨게 하고, 누군가의 먹거리를 마련해 주었으며, 심지어 그 산업에서 비켜 서 있던 사람들에게도 원초적인 두근거림을 심어 준 거인."

누군가는 그래 봐야 무협지와 만화일 뿐 아니냐고 깎아내립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고전은 시간을 견뎌낼 수 있어야 고전입니다. 지금도 케이블 채널 어딘가에서 지칠 줄 모르고 방영 중인 진융의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 자신의 온라인 플랫폼을 '영웅문'으로 명명한 국내 증권사, 한국의 10대까지 홀리고 있는 스탠 리의 수퍼 히어로…. 태어난 지 몇 달을 견디지 못하고 운명을 달리하는 '예술'이 부지기수인 세상에서, 이 무협과 만화의 존재증명은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뉴욕 맨해튼 북서쪽에 있는 미국문학예술아카데미의 청동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 오직 예술만이 지치지 않고 우리와 함께 머문다. 예술의 문을 통해 우리는 행복한 신전으로 들어간다."

엉덩이는 빨개졌지만, 두 거인 덕분에 행복한 신전 맛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 번, 진융과 스탠 리의 명복을 빕니다.

[어수웅·주말뉴스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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