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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간호섭의 패션 談談]〈11〉신성일, 패션의 별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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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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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섭 패션디자이너·홍익대 미술대 교수


사람의 운명은 이름을 따른다고 했던가요? 얼마 전 타계한 배우 신성일은 이름 그대로 ‘申星一’, 유일한 별이자 ‘으뜸 별’이었습니다. 총 5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고 각종 영화제에서 큰 상들을 수상한 대배우였던 만큼 세대가 바뀌어도 존재감이 뚜렷했지요. 데뷔작인 ‘로맨스 빠빠’(1960년)를 볼 때면 청춘이었던 그의 모습에 놀라기도 했지만 정리해고된 가장의 모습이 요즘과 다르지 않음에 공감하기도 합니다. 또한 2남 3녀의 자식들이 연기가 어찌나 그리 현실감이 있는지, 제가 기억하는 3남 4녀의 친가 풍경과 3남 5녀의 외가 모습이 영화에 그대로 녹아 있는 듯했죠.

신성일의 청춘은 영화 ‘맨발의 청춘’(1964년)에서 빛을 발했습니다. 잘생긴 배우들이 주로 맡았던 귀공자의 이미지가 아니라 허리선 위로 올라오는 짧은 가죽점퍼와 딱 붙은 청바지 패션으로 젊은 청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툭툭 뱉는 듯한 거친 말투와 저항적인 스트리트 패션이 어울려 반항아의 매력을 뿜어냈습니다. 여성을 넘어 남성들까지 그 패션을 따라했습니다. 구제시장이나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물건을 취급하는 남대문시장으로 청바지를 구하려는 청춘이 몰려들었습니다. 멀쩡한 옷을 푸른 물감으로 염색을 하는 해프닝도 있었으니, 신성일의 패션은 곧 청춘의 상징이었습니다.

또 다른 전기가 된 작품은 영화 ‘만추’(1966년)였습니다. 사고로 남편을 죽인 여성 모범수가 특별휴가를 마치고 가는 열차 안에서 위폐범으로 쫓기는 젊은 남성을 만나면서 나누는 짧고 애틋한 사랑 이야기입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서양 젊은이들의 멜로 스토리 고전이라면 ‘만추’는 성숙한 어른들의 한국 멜로 스토리라고 할 수 있죠. 휘날리는 트렌치코트 자락은 가을남자의 패션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1982년엔 김혜자, 정동환 주연으로, 2011년에는 배우 탕웨이, 현빈 주연으로 리메이크되어서도 남자 배우들의 패션에서 트렌치코트를 빼놓을 수 없었죠.

중년에 접어든 배우 신성일은 나이에 어울리는 역할을 자처합니다. 젊고 반항적이고 활력 넘치는 이미지에서 세상과 타협하는 기성세대의 모습을 보여준 영화는 바로 ‘별들의 고향’(1974년)이었습니다. 첫사랑에게 버림받고 호스티스로 전락한 여자 주인공과 그 무렵 만난 남자 주인공인 화가의 패션은 절제되었으나 자유로웠습니다. 흰색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는 대신에 니트 티셔츠에 실크 머플러를 셔츠 칼라 안쪽으로 둘렀습니다. 위아래 한 벌로 입은 감색 슈트 대신에 흔히 콤비 재킷이라고 부르는 트위드 소재의 재킷을 입었습니다. 이 패션은 전문직 종사자, 특히 예술 분야와 관련된 소설가, 건축가, 화가들이 입는 패션의 대명사가 되었죠. 세상과 타협하면서도 본인의 창작은 포기할 수 없는, 호스티스 애인을 사랑하면서도 본인의 인생은 포기할 수 없었던 내면을 표현한 패션이 아닐까요.

신성일은 화려한 외모와는 달리 건달, 고학생, 위폐범 등 사회를 등진 역할을 맡았을 때, 턱시도보다는 영화 속 배역의 패션을 보여줬을 때가 더 돋보였습니다. 그래서 배우인가 봅니다. 맨발로 배우의 길에 뛰어들어 빛나는 별이 되었고 결국 별들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배우 말입니다.

간호섭 패션디자이너·홍익대 미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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