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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문화 인&아웃] 낙엽을 밟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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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요즘을 낙엽의 계절이라 할 만하다. 어딜 가나 노란 은행나무 잎이며 넓적한 플라타너스 잎이 보도에 뒹구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내가 사는 아파트 뒤쪽에 나 있는 오솔길에도 낙엽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산책하는 길에 그 모습이 다감하여 사진을 찍어 몇 지인에게 보냈더니 많이 아쉽다는 반응들이 주를 이뤘다. 이제 아름다운 단풍을 볼 수 없는 것을 아쉽다 했을 터다. 정말 단풍을 좀 더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마음 한편에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발목까지 쌓인 낙엽 위를 걸으며 낙엽들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이들 낙엽을 보내준 나무야말로 삶의 의미를 깨우쳐 주는 고마운 존재라는 생각을 하였다.

이효석은 그의 수필 '낙엽을 태우며'에서 담쟁이를 일컬어 집 안을 통째로 초록의 세상으로 변해줄 때가 아름다운 것이지 잎을 다 떨어뜨리고 앙상하게 드러난 벽에 메마른 줄기를 둘러칠 때쯤에는 다시 거들떠볼 값조차 없고, 그 낙엽은 귀찮은 것이라 했지만 글쎄 정말 그런 것일까. 어느 나무며 낙엽치고 값없는 것이 있을까.

낙엽은 내게 겸손하게 살라고 말한다. 세상은 흥한 때가 있으면 쇠할 때가 있는 것이 순리임을 나무의 일생을 통해서 알려주면서 말이다. 여름의 무성한 위용과 가을의 눈부신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나무들이 결국 본태의 나목으로 돌아가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 주면서 우리의 삶이 다하는 날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임을 말없이 웅변으로 일갈한다. 이럴진대 우리 인생들이 어떻게 거들먹거리며 살 수 있겠는가. 낙엽은 내게 이 세상의 삶을 마감하는 날까지 늘 교만하지 말고 가난한 마음으로 살라고 가르쳐 준다.

낙엽은 또한 내게 버리는 것이 선한 것임을 손수 본으로 보여준다. 낙엽이 낙엽 되기 전 단풍 든 잎사귀들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호사였고 또 호사를 안겨줬겠는가. 어느 왕궁의 여왕 부럽지 않은 자태를 천년만년 뽐내고 싶지 않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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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때가 되어 썩어짐으로 토양을 살리는 낙엽으로 버려진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때로 사람보다 낫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인간들은 한창 시절의 추억에 사로잡혀 마땅히 놓고 떠나야 될 때를 놓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마냥 움켜쥐려고 발버둥 치며 염치도 잃은 채 추하게 늙어가는 모습을 얼마나 많이 목도하는가.

낙엽은 내게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리와 명예와 재산 같은 것에 대한 탐욕을 버리라고, 그리고 아무 데나 나서지 말라고 준엄하게 훈계하는 것 같다.

낙엽은 내게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가르쳐 준다. 상록수가 아닌 다음에야 대부분의 나무들은 봄이 되면 순이 돋아나고, 여름이 되면 무성해지며, 가을이 되면 단풍으로 물든다. 때마다 다 나름의 아름다움과 존재의 이유가 있다. 그러나 이들의 이같이 됨은 이들의 노력이라기보다 다 섭리 가운데 옷 입혀졌던 것일 따름이다.

그래서인지 우리 인간들은 때로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다 내 것인 양하며 살지만 나무들은 자기 재산이요 분신인 잎사귀들을 군말 없이 대지 위에 내어 준다. 나는 내 직업, 재산, 자식, 그리고 쥐꼬리만 한 능력 같은 것들도 다 거저 받은 것이고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잠시 맡아 관리하는 것임을 잊은 채 살아 왔다. 낙엽은 내게 현재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고 오히려 나누며 사는 것이 도리라고 가르쳐 준다.

이 늦가을이 가면 금방 살을 에는 추위가 겨울 되어 다가올 것이다. 낙엽을 선물한 채 알몸으로 겨울을 지내야 하는 나무들은 혹한을 어떻게 견뎌낼까. 아마도 다 내어 준 그 따뜻한 마음을 난로 삼아 봄을 향한 소망을 굳게 붙잡은 채 긴 시간을 이겨낼 것이다. 오히려 추위가 오면 더없이 힘들고 아픈 우리 주위의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을 더 걱정할 것이다. 이번 주말에 낙엽들을 밟으며 그들이 전하는 말을 잠시 귀 기울여 들어 보면 어떨까.

[박양우 중앙대 예술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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