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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오태식의 알바트로스] `유혹의 천국`에서 버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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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핫식스'란 애칭을 갖고 있는 이정은을 좋아해서 골프공에 그처럼 늘 '6'을 표시해 놓고 라운드하는 주말골퍼가 있었다. 어느 날 티샷이 잘 맞았는데 그만 보이지 않는 해저드로 들어간 것 같았다. 해저드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산신령 모습을 한 노인이 나타났다. 연못 속에서 누가 봐도 낡은 골프공 하나를 꺼내 들고 나오더니 "이 공이 네 공이냐?" 하고 묻는 게 아닌가. 골퍼가 아니라고 손사래 치자 이번에는 '6'이 쓰인 골프공을 갖고 나오더니 다시 "이 공이 네 공이냐?"고 묻는다. 분명 자신의 공이 맞지만 갑자기 '1벌타'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이번에도 "그 공은 제 공이 아닙니다" 하고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그 노인이 이번에는 연못 밖에 있는 공을 가리키며 "그럼 혹시 저 공이 네 공이냐?"고 물었다. 어차피 시작한 거짓말. 그 골퍼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아니요"가 아니라 "예"였다.

인자하던 얼굴이 갑자기 무섭게 돌변한 노인이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꾸짖는다. "고얀 놈, 양심이 불량하구나. 누구를 속이려 드느냐. 앞으로 해저드를 만나면 항상 공 하나를 잃어야 할 것이다." 그날 이후 그 골퍼는 해저드만 만나면 공을 꼭 수장시키고야 마는 '공수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골프는 가장 룰과 매너를 무시하기 쉬운 스포츠다.'

골프 마니아가 들으면 "무슨 소리냐"며 강력하게 반발할지 모르겠다. 골프는 룰과 매너를 가장 중시하는 스포츠라고 하지 않는가. 하지만 골프를 하다 보면 실제로 수많은 유혹을 받게 된다는 사실 또한 인정하게 된다. 눈 한번 '질끈' 감으면 타수를 줄일 수 있는 상황이 자주 찾아온다. 골프장은 사실 '유혹의 천국'인 것이다.

얼마 전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퀄리파잉 시리즈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 대만 출신 도리스 첸이 골프 규칙을 위반한 부정행위로 실격된 사건이다. 첸이 친 공이 OB(Out of Bounds) 구역으로 날아갔다. 마침 그 공 근처에 있던 모친이 그 공을 발로 차 안쪽으로 보내면서 불상사가 벌어졌다. 그의 캐디가 경기위원을 불러 시시비비를 가리자고 했지만 첸은 이 충고를 무시하고 그 공으로 플레이를 한 것이다. 결국 첸은 실격을 당했고, 그의 캐디가 방송 인터뷰에서 사실을 밝히면서 첸은 '양심 불량' 골퍼로 낙인찍히게 됐다. '골프 맘'의 삐뚤어진 모정도 문제였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그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 딸의 잘못된 행동이었다.

골프장에서 규칙 위반을 하고 싶은 유혹에 한 번이라도 빠지지 않았던 골퍼는 없을 것이다. 잘 맞은 공이 디벗 자국에 들어갔을 때 살짝 옮기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그런 마음이 한 번도 들지 않았다면 그 골퍼는 '거짓말쟁이'거나 '천사'일 것이다. 또 살짝 OB 구역을 벗어난 공을 그대로 치고 싶은 유혹도 생긴다. OB면 무려 2타 손해 아닌가. 남들이 오기 전에 빨리 쳐 버리면 그만이다. 가장 유혹에서 벗어나기 힘든 순간은 숲속으로 공이 들어갔을 때일 것이다. 숲속에서 일어난 일은 자신과 나무와 공 외에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세상 스포츠 중 가장 재미있다는 골프는 한편으로는 유혹과의 중단 없는 싸움인 것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산신령과 관련한 유머 중 하나다. 산신령이 대한민국에게 물었다. "이 더위가 너희 것이냐?" "아니옵니다. 그건 북태평양의 것이옵니다." "그럼 이 추위는 너희 것이냐?" "아니옵니다. 그것은 시베리아의 것이옵니다." 산신령이 또 묻는다. "그럼 이 미세먼지는 너희 것이냐?" "아니옵니다. 그것은 아마도 중국에서 날아온 것 같습니다." "정말 착하구나. 그럼 이 세 가지 모두 네가 가지도록 하거라."

아, 이런 대답을 들으려고 한 것은 아닌데. 너무 착하기만 해도 안 되는 것일까. 그래도 '신사 골퍼' 대한민국은 여전히 '차카게' 플레이해야만 한다.

[오태식 스포츠레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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