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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뉴스AS] ‘집 아닌 집’에서 나는 화재, 가장 취약한 자리에는 외국인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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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AS] 언어장벽 외국인 ‘안전 사각지대’ 내몰려

국일고시원 화재 때도 일본인 1명 사망…베트남인·중국인 각 2명 대피

완강기 사용법 등 외국어 표기 없고 119 신고도 3자 통화로 통역해


한겨레

9일 오전 불이 나 7명이 숨진 서울 종로구 국일고시원 화재 현장의 이틀 뒤 모습(오른쪽 사진). 경찰의 명부를 확인한 한 생존자가 고시원에서 자신의 짐을 챙겨 어디론가 옮기고 있다.(왼쪽 사진)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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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출신 대학생 ㄹ(28)씨는 지난 9일 새벽을 떠올리면 아직도 아찔하다. 이날 7명의 목숨을 앗아간 서울 종로구 국일고시원 화재 현장에 ㄹ씨도 있었다. ㄹ씨가 살던 곳은 고시원 2층이었는데, 발화 지점인 301호 쪽 계단 출구가 막혀 탈출하지 못한 3층 사람들만 숨졌다. 대학원을 다니는 ㄹ씨는 “보증금 부담이 없어 고시원에 살게 됐다”고 했다.

고시원 화재가 곧 ‘주거 빈곤층의 참사’가 된 지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이번 화재를 계기로 ‘화재 안전 사각지대’에 내몰린 외국인들의 처지도 눈길을 끌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 등은 화재 방재 장비가 취약한 곳에 사는 것에 더해 대피와 관련한 정보를 읽어낼 수 없는 언어 장벽까지 겹치면서 예상치 못한 재난 사각지대에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10월 경남 김해의 원룸에서 불이 나 숨진 우즈베키스탄 아이 두 명도 한국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 피해가 컸던 것으로 알려진 바 있다.

이번에 사고가 난 국일고시원에도 두 층 54개(2층 24개, 3층 29개, 옥탑방 1개) 방 가운데 5곳에 외국인이 살고 있었다. 일본인 1명은 목숨을 잃었고, ㄹ씨와 같은 베트남인 2명과 중국인 2명은 대피한 뒤 다른 고시원으로 이주했다.

■ 고시원은 외국인 재난 대피 사각지대

국일고시원 화재처럼 스프링클러도 없고 화재경보기도 울리지 않는 곳에서 불이 났을 때, 외국인들은 더 위험한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다. <한겨레>가 국일고시원 이재민들이 임시 거주하는 인근 고시원 8곳 가운데 4곳을 돌아본 결과, 비상구나 소화기, 완강기의 위치와 화재 시 대피요령 등을 적어놓은 피난 안내도는 모두 한국어로만 적혀 있었다.

피난 통로로 사용되는 비상구에 계단도 없이 완강기만 있거나 완강기가 설치된 곳에 조명이 없어 완강기에 붙어 있는 사용법이 보이지 않는 곳도 있었다. 고시원 쪽에서 거주하는 외국인들을 상대로 별도의 완강기 사용 안내나 피난 안내도를 설명하는 일도 없다.

지난 7월 ‘비주택 주거실태 파악 및 제도개선 방안’을 연구한 적이 있는 김두겸 한국도시연구소 연구원은 “부천시에 있는 고시원 35곳을 둘러보니 피난 안내도가 있는 25곳 가운데 영어 표기가 있는 곳은 2곳에 불과했고, 영어 이외의 언어로 설명해놓은 곳은 1곳도 없었다”며 “소화기나 비상구와 달리 완강기는 그림만으로는 알아보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 119 신고, 외국인이 하면 3자 통화 연결

재난이 발생했을 때 외국인들이 직접 119 신고를 통해 최대한 빨리 재난에 대처하는 시스템도 갖춰지지 않았다. 언어 문제 때문이다. 119 신고센터에 외국어 전담 인력이 없는 대부분의 지방자치단체는 외국인들이 119 신고를 하면, 신고자와 소방서, 통역 기관이 ‘3자 통화’를 하면서 신고를 접수한다. 한국어를 할 수 없는 외국인이 전화를 걸어오면 접수하는 소방대원은 한국관광공사나 외국인종합안내센터, 통역 봉사단체 비비비(BBB) 코리아 통역서비스, 한국외국인력지원센터 등에 통역 서비스를 요청하고 요청에 응한 곳에서 동시통역을 해주는 방식이다. 서울종합방재센터 관계자는 “외국인의 신고를 접수할 때는 내국인 신고와 달리 한 단계 거쳐서 소통하기 때문에 접수 시간이 더 걸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전담 인력이 있는 지방자치단체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국회 행정안전위원장인 인재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소방청으로부터 제출받은 국정감사 자료를 보면, 올해 6월 현재 119 신고센터에 외국어 전담 인력을 보유한 시·도는 광주·울산·충남·전북·경남 등 5곳이다. 그런데 이들 5개 시·도 소방서 역시 한국어를 못하는 외국인이 신고하면 업무 협정을 맺은 통역 자원봉사자 등과 3자 통화를 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었다. 외국인 신고 접수가 가능한 소방대원이 있는 곳도 교대근무를 하는 탓에 전담 인력이 근무 중일 때만 외국인 직접 접수가 가능했다.

인세진 우송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외국인 거주자들이 많은 지역만이라도 인력을 확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도 “국제회의 등에서 주로 쓰이는 동시통역 장비를 소방서에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통계청이 지난 8월 발표한 ‘2017 인구주택총조사’를 보면, 2017년 기준 국내 체류 외국인은 147만9천명에 이른다. 인구의 2.9%로, 100명 중 3명이 외국인인 셈이다.

■ 한국어로만 오는 ‘재난안전문자’

자동으로 발송되는 ‘재난안전문자’ 알림에서도 외국인들은 소외돼 있다. 현재 긴급 재난 문자는 기상청, 행정안전부 등 중앙 부처와 지방자치단체 등에서 전송하는데, 모두 한국어로만 전송된다. 행정안전부에서 개발한 ‘이머전시 레디’(Emergency Ready) 앱을 내려받으면 영어와 중국어로 번역된 긴급 재난 문자를 받을 수 있지만, 홍보가 되지 않아 앱의 존재조차 모르는 외국인이 대부분이다. 행정안전부 관계자는 “지방자치단체에서 전송하는 긴급 재난 문자는 현재 번역 소프트웨어로는 특정 지명 등에 대한 번역률이 낮아 오역의 가능성이 크다”며 “번역률을 높이고 있는 중”이라고 전했다.

안전사회시민연대 최창우 대표는 “이웃과 소통하지 않고 단절된 채 지내는 고시원의 특성상 한국말이 서툰 외국인들은 특히 더욱 고립될 수밖에 없다. 재난 상황에 대한 안내가 필수고 재난 대피 교육도 미리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오연서 최민영 기자 lovelett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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