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6 (금)

"지상파, 돈없어 드라마 못한다고? 정체성부터 회복해야"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은퇴하는 김영진 감독…"장애 얻은 후 사각지대 다루는 게 사명"

연합뉴스

김영진 감독
KBS 제공



(서울=연합뉴스) 이정현 기자 = "단막극 중에 시청률이 제일 잘 나왔다기에 얼마나 잘 나왔나 했더니 3.8%래. 아이 쪽팔려∼ (웃음)"

요즘 성적이 저조하다는 웬만한 미니시리즈보다 좋은 결과이지만, 1998년 '야망의 전설'로 시청률 50%도 훌쩍 넘겨본 김영진(58) 감독에게는 피식 웃음 날 법한 일이기도 하다.

KBS 2TV 단막극 '엄마의 세 번째 결혼'으로 파란만장한 30여 년 드라마 PD 인생의 한 단원을 닫는 김 감독을 최근 서울 여의도 KBS별관에서 만났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실수한 부분이 눈에 띄었다. 30여년간 그렇지 않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엄마의 세 번째 결혼'
KBS 제공



'엄마의 세 번째 결혼'은 3대 모녀의 갈등과 화해를 그려 시청자의 공감을 얻었다. 김 감독은 "모정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그것만 다루면 식상한 것 같아서 화해라는 코드를 더했다"며 "딸이 엄마한테 '엄마처럼은 절대 안 살 거야' 하면 엄마가 '너랑 똑같은 애 낳아서 살아봐, 이 년아' 하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감성"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마지막은 김영옥, 이일화, 이열음이 함께했다. 김 감독은 "한 PD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하면 배우들이 열심히 안 할 수도 있겠다 생각했는데 굉장히 열심히 해줬다. 배우들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는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회복'이라는 표현에 대해 좀 더 묻자, "사실 안 되면 작가와 PD 탓만 하고, 잘 되면 자기 공으로만 돌리는 배우도 적지 않지 않느냐"고 특유의 직설적인 화법으로 답했다. 옛 에피소드를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옛날에는 정말 끈끈했지요. 촬영할 때면 같은 방에서 지내고, 집들이도 하고 그랬는데. (최)수종이는 어느 날 '저 4박5일만 아기 좀 만들러 괌에 좀 다녀올게요' 하더라고. 당시에 수종이가 힘들었죠. '어떻게 최수종 더 괴롭힐까'만 고민했거든. 그래야 재밌다고들 하니까. (웃음)"

연합뉴스

'야망의 전설'의 최수종
KBS와 포털사이트 제공



김 감독은 연출에 대한 끊임없는 욕구도 강조했다. 신문기자, 광고회사를 거치면서도 삼수 끝에 방송사에 입성한 그다.

'야망의 전설', '사랑하세요?'로 인기 가도를 달리던 그는 2000년 가족 여행 중 사고로 척추를 다치면서 1급 장애인이 됐고 2010년 단막극으로 복귀할 때까지 10년간 작품에 대한 갈증을 삼켜야 했다. 이번 은퇴 역시 누구보다 아쉽다고 했다.

"당연히 계속하고 싶죠. 오죽했으면 KBS에 '내가 돈은 안 받을 테니 재능기부로 연출하면 안 되겠느냐' 했어요. 사규상 안 된다네요. 허허. 기획한 게 얼마나 많은데요. 다 엎어져서 그렇지…."

그런 그에게 단막극은 갈증을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는 고마운 창구였다.

김 감독은 "스포츠로 치면 기본인 육상과도 같은 게 단막극이다.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단막극은 폐지돼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사고 후에는 미니시리즈 같은 걸 나한테 안 맡겨준다며 원망도 했지만 아마 미니시리즈나 연속극을 했으면 체력이 부족해 쓰러졌을 것이다. 단막극으로 기회를 준 게 진심으로 고마웠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어 "사고 이후 장애인, 치매 노인, 왕따, 기러기 아빠 등 사회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게 됐다"며 "제가 다쳐보니 그 마음들을 알겠더라. 그들을 다루는 게 사명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2011년 장애인 공연단을 담은 영화 '꿍따리 유랑단'을 내놓기도 했다.

연합뉴스

드라마 '사랑하세요?'
KBS와 포털사이트 제공



김 감독은 베테랑인 자신에게도 최근 급변하는 방송 제작 환경은 적응하기 쉽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새벽 5시에 방에 들어와 두 시간 후 다시 출근하던 시절도 이제는 '주 52시간(방송은 한시적으로 68시간) 근로' 정책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인건비를 중심으로 제작비 역시 폭등, '방송은 돈'이라는 공식이 더욱 굳어지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김 감독은 "어려운 점은 알지만 지상파가 더 정체성을 회복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쓴소리를 했다. "감동을 주면 사람들은 따라와요. 그 감동 코드를, 새로운 길을 찾는 게 지상파 역할이지. 물질 만능 시대라지만 아름다운 이야기, 좋은 이야기는 시대를 막론하고 먹히거든. 대세만 따라가면 대세를 못 이겨요."

김 감독은 방송사에도 "작가들에게 투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작가들과 100부로 계약하고 70부만 써내면 30부에 대한 돈을 물어내라고 하던 시절도 있었다"고 웃으며 "작품은 자판기처럼 100원 넣으면 한 개 나오는 게 아니다. 투자로 생각하고 기다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후배 연출자들에게도 "새로운 걸 해봤으면 그걸로 충분하다"며 "초반에는 망해도 마음껏 해봐야 한다. '당당하게 그러나 거만하지 않게, 겸손하게 그러나 비굴하지 않게' 연출했으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연합뉴스

김영진 감독
KBS 제공



김 감독은 정년퇴직까지 남은 2년은 역시 '공부'에 쓰겠다고 했다.

"영화, 드라마를 보면서 영상론을 공부하고 있어요. 책으로도 남길 수 있다면 참 좋겠죠. 그리고 연출도 영원히 하고 싶어요. 나중에 죽어서도. 천국이라고 마냥 평안하지 않을 거고 갈등이 있을 텐데 거기 사람들 데리고 내 드라마 한 번 또 찍어보려고. (웃음)"

lisa@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