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5 (목)

문장으로 남은 문인들, 서점가를 휩쓸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매일경제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인간은 유한하고 문장은 영원하다. 이것은 절대적인 비극이지만 다행스럽다는 의미에선 희극이다. 하늘의 부름을 받는 일(召天)이든 세상과 헤어지는 일(別世)이든 문인이 떠난 자리엔 시와 소설이 남기에 공허하지 않을 수 있다. 유산처럼 문장을 남기고 평온의 안식처로 걸어간 문인이 올해는 유독 많았다. 고인이 된 시인과 소설가의 문학에서 위안을 받으려는 만추의 추모 열기를 되돌아봤다.

14일 문학출판계에 따르면 독일에서 작고한 고(故) 허수경 시인(1964~2018) 시집 판매량이 작년 대비 3배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문학과지성사에서 선보인 허수경 시인 시집 '혼자 가는 먼 집'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는 연간 판매량이 3000부 수준이었으나 올해는 10월 말까지 1만부로 증가했다.

허수경 시인이 문학동네에서 출간한 시집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은 작고 직후 2000부 증쇄했고, 8월 출간한 산문집 '그대는 할 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는 초판 3000부에 이어 작고 직후 6000부를 증쇄해 현재까지 출고량이 9000부를 넘겼다. 뮌스터 기행 산문집 '너 없이 걸었다'도 1000부 증쇄했다. 허 시인의 오랜 문우 김민정 시인은 "사후 거의 전작을 증쇄한 이례적 사례"라며 "허수경 시인이 온몸으로 남긴 시의 울림을 통해 삶에 위로를 받으려는 독자들"이라고 설명했다.

영혼의 광장에서 자유를 얻었을 고 최인훈 소설가(1936~2018)도 판매량이 껑충 뛰었다. 세대를 거듭해 읽힌 명저 '광장'을 비롯해 열두 권으로 꿰매진 '최인훈 전집' 등 문학과지성사의 최인훈 작가 책 출고량은 매년 1만부 수준이었다가 올해는 현재까지 1만5000부로 증가했다. 사유의 진폭과 울림이 사후에도 독자에게 올곧이 뻗어나갔다. 문학평론가 정과리 연세대 교수는 "자유로운 개성을 발하려는 우리 젊은 세대가 개인의 주체성을 되돌아보고 각성하는 데 최인훈 소설이 준거점이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마치 비석처럼 두 권의 산문집을 남긴 고 황현산 문학평론가(1945~2018)도 독자를 영원한 추모의 '밤'으로 안내 중이다. 2013년 세상에 나온 황현산 평론가의 첫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는 올해 상반기까지 총 인쇄량이 6만6000부였는데 이 가운데 1만부가 작고한 8월 이후 찍은 증쇄량이다. 병상 한 귀퉁이에서 황현산 평론가가 마지막까지 붙들었을 산문집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도 별세 후 1만부를 더 찍어 지금까지 2만3000부가 나가며 여전히 독자와 대면하고 있다.

한 번쯤 다시 들춰봄직한 문인의 목소리는 서점가 책장에서 독자의 호명을 기다리고 있다. 고 김윤식 문학평론가(1936~2018)가 서울대 퇴임 당시 저서 100권에서 추린 서문(序文)을 모아 낸 '김윤식 서문집'(사회평론)이나 현장 비평으로 인간의 해석을 시도한 2015년작 '내가 읽은 우리 소설'(도서출판 강) 등이 대표적이다. "말하지 않아도 되는 말"이라며 김윤식 교수는 손사래를 쳤지만 '불필요한 말의 불가피함'이 곧 문학임을 절절하게 느낄 수 있다.

'하늘 이불'을 덮고 잠든 고 조정권 시인(1949~2017)의 유고집 두 권도 출간됐다. 시집 '삶이라는 책'과 산문집 '청빙'(파란) 출판기념회가 17일 열려 작고 1주기 만에 독자와 만난다. '따스한 닭'을 키우며 '새벽마다 정신의 땅'을 팠을 고 이승훈 시인(1942~2018) 시전집 '이승훈 전집'(황금알)도 기억해야 할 명저다. 제주라는 변방의 삶을 반추한 고 문충성 시인(1938~2018) 시집도 마찬가지다.

지난 9월 이효석문학상 본심에 오른 직후 세상을 떠나 안타까움을 더했던 고 최옥정 소설가(1964~2018)의 '늙은 여자를 만났다'(예옥)와 '오후 세 시의 사랑'(삼인행), 투병 사실을 숨긴 채 온몸으로 시를 남긴 고 박서영 시인(1968~2018)의 '좋은 구름'(실천문학)과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천년의시작),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최초 번역했던 최민 시인(1944~2018)의 '어느날 꿈에'(창비)와 '상실'(문학동네), "자유를 향한 생명 에너지의 발현과 응집"이란 평을 받은 고 김혜연 시인(1957~2018)의 첫 시집이자 유고작 '음각을 엿보다'(종려나무)도 우리 곁에 남겨졌다. '영혼이 불타는 바다'로 떠난 곽현숙 시인(1942~2018), '눈물'을 '공양'하는 심정으로 평생 시를 남겼을 박노정 시인(1950~2018)의 시세계도 헤아림직하다.

문장으로 삶을 증거하다 결국 문장이 되어버리는 길은 문인의 숙명이다. 그래서일까. 첫 시집 '뭇별이 총총'(실천문학)에 이어 두 번째 시집의 교정지를 매만지다 결국 세상의 끝으로 떠나고야 만 고 배영옥 시인(1966~2018)의 시 한 구절은 울림이 크다. 어떤 유언인 양, 그네들의 운명을 응축하는 전언처럼.

'…필자는 없고 필사만 남겨지리라 먼저 다녀간 누군가의 배후를 궁금해 하리라 마음이 거기 머물러 영원을 돌이켜 보리라….'(배영옥 시 '훗날의 시집' 부분)

[김유태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