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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정치게임에 오염되는 카슈끄지 녹음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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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YT, 피살상황 파일 일부 공개… 캐나다는 '녹음파일 들었다' 인정

프랑스는 '녹음파일 모른다' 부인, 사우디와 친소관계 따라 제각각

사우디아라비아 반정부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암살의 진상 규명은 멀어지고,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른 정치적 분쟁 소재가 되어가는 모양새다.

뉴욕타임스(NYT)는 12일(현지 시각) 카슈끄지 피살 상황을 담은 녹음 내용 일부를 공개했다. 지난달 2일 카슈끄지가 터키 이스탄불 사우디 총영사관에서 살해된 직후 암살조 중 한 명이자 무함마드 빈살만(33) 왕세자의 경호원인 마헤르 압둘아지즈 무트레브가 사우디 왕실의 누군가와 통화한 내용이다. 무트레브는 아랍어로 "(임무가 잘 수행됐다고) 당신의 보스에게 말하라"고 얘기했다. 미 정보 당국은 이 '보스'를 '빈살만 왕세자'로 보고 있다고 NYT는 전했다.

이 녹취는 미 중앙정보부(CIA)가 터키로부터 넘겨받은 파일에서 흘러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지난 10일 "카슈끄지 살인 현장에서 벌어진 녹음 파일을 사우디·미국·독일·프랑스·영국 등에 제공했다"고 말했다. 녹음 파일 존재는 터키 매체나 외신을 통해 지난달부터 알려졌지만, 터키 정부가 공식 거론한 것은 처음이다. 미국 등에 진실 규명과 후속 대처를 압박하기 위한 의도로 해석된다.

블룸버그통신은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번 사태를 통해 자신의 이미지를 독재자에서 책임감 있는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바꾸려 한다"며 "그러나 자신이 직접 빈살만을 겨누는 리스크는 지지 않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터키는 이슬람 수니파 맹주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사우디를 견제하려 하지만, 사우디를 엄호하는 미국 트럼프 정부 등에 맞서거나 앞서나갈 역량은 안 된다는 것이다. 터키는 숙원인 유럽연합(EU) 가입 등 문제로 유럽의 눈치를 보는 상황이다.

그러나 서방 어느 정부도 녹취 내용을 쉽게 인정하지 않고 있다. NYT는 "각국이 녹음을 인정하더라도 카슈끄지 사태가 왕세자와 연관 있다는 직접 증거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게 전·현직 정보 관계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라고 전했다. 그보다 더 깊은 이유는 최대 원유 생산국이자 미·유럽산 무기의 최대 큰손인 사우디 왕실을 계속 흔들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터키 정부가 전달했다는 녹음 파일에 대한 반응도 제각각이다. 독일 정부는 12일 "독일과 터키 정보기관 사이에 소통이 있었다"는 정도만 발표했다. 프랑스의 장 이브 르드리앙 외무장관은 "프랑스는 (터키로부터) 녹음을 받지 않았다"며 "에르도안 대통령이 정치적 게임을 하고 있다"고 터키 정부의 발표를 부인했다. 그러나 캐나다의 쥐스탱 트뤼도 총리만 12일 "정보 당국이 녹취를 들었다"고 밝혔다. 각 나라 사정을 보면 왜 이런 모순된 반응이 나왔는지 알 수 있다. 프랑스는 미국·영국에 이어 사우디에 세 번째로 무기를 많이 수출하는 국가다. 반면 캐나다는 현재 사우디와 단교에 가까운 외교 관계인 데다 무역도 동결한 상태다. 녹음 파일과 관련한 '사실(fact)'은 사라지고 정치만 남은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카슈끄지 사건으로 빈살만 왕세자의 위상이 다소 불안해지긴 했지만, 후계자 지위는 변함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는 13일 보도했다. 살만 국왕이 왕세자의 국정 영향력을 줄이려 하지만, 일부 권한을 내려놓는 정도라는 것이다. 최근 빈살만은 추방·감금했던 경쟁자 왕자들을 일부 복권시키고, 각 지역에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발표하는 등 민심 수습에 힘을 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남정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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