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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의 대화] 반구대암각화를 지켜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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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1970년 12월 24일, 그날은 유난히도 추웠다. 불교조각 권위자 문명대 동국대 교수는 혹한 속에 원효대사가 수행하면서 저술활동에 전념했다는 울산시 울주군 대곡천 유역의 반고사(磻高寺) 터를 탐사하고 있었다. 3년 전부터 진행한 '울산권 불교유적 조사'의 마지막 일정이었다. 계곡엔 기암괴석의 명승 반구대(盤龜臺)가 있다. 경주에서 지척이라 신라 왕족과 화랑, 승려들이 찾아 명문 등 무수한 흔적을 남겼다.

문 교수는 그날 이곳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대행운을 건진다. 반구대에서 계곡을 따라 1.5㎞가량 상류로 거슬러 올라간 지점의 바위에서 이끼에 덮인 희미한 그림을 발견한 것이다. 선사시대의 각종 인물상과 동물상, 기하학 무늬가 속속 나타났다. '천전리 암각화'(국보 제147호·1973년 지정)였다.

문 교수는 이어 하류에는 호랑이 그림도 있다는 흥미로운 얘기를 주민에게 듣는다. 이듬해 12월 25일 고려대 김정배 교수, 충북대 이융조 교수까지 끌어들여 찾아나섰다. 배를 타고 반구대에서 1㎞쯤 내려갔을까, 사연댐 입구 쪽 암벽에 발가벗고 춤을 추는 나체인과 거북, 물고기의 선명한 그림이 시야로 들어왔다. 반구대 암각화로 잘 알려진 '대곡리 암각화'(국보 제285호·1995년 지정)가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사실 울산 반구대 암각화는 두 곳 암각화를 모두 지칭한다. 두 암각화는 바위에 문양을 새긴 기법과 내용이 유사하지만 사실적 묘사나 규모 면에서 대곡리 암각화가 압도적이다. 대곡리 암각화는 넓이 8m, 높이 5m 크기에 다양한 인물상, 동물상, 악기나 사냥무기 등 도구상, 기호가 그려져 있다. 그림은 모두 307점이며 이 중 동물상이 169점(55%)으로 가장 많다. 그중 고래가 53점이다. 북방긴수염고래, 혹등고래, 참고래, 귀신고래, 향유고래 등 실로 다양한 종류의 고래가 등장한다. 세계 암각화 중 가장 많은 종류의 고래 그림이다. 배와 작살, 그물을 이용해 고래를 잡는 포경 장면도 생동감 있게 묘사됐다. 역시 세계 암각화에서 유례가 없다.

고래와 함께 바다거북, 바다새, 물고기, 물개, 상어, 그리고 붉은사슴, 대륙사슴, 사향노루, 노루, 고라니, 산양, 호랑이, 표범, 멧돼지, 너구리, 늑대, 여우, 산토끼 등 최소 23종의 동물이 확인된다. 동물 조각엔 먹이활동, 짝짓기 장면도 눈에 띈다. 인물상은 14점으로 남근을 과장되게 새겨 넣었고, 가면처럼 얼굴만 있거나 긴 막대를 부는 인물도 보인다.

암각화는 경제와 생산, 식생활과 종교의식 등 당대 문화의 총체적 상징물인 것이다. 제작 기법이 매끈하고 정교하나 금속 도구를 사용한 흔적은 없다. 신석기 중기 이후부터 청동기 전반기(기원전 6000년~기원전 1500년)까지 순차 조성됐다고 판단한다. 울산 황성동 작살 박힌 고래뼈, 부산 동삼동 패총 사슴문토기, 양양 오산리 얼굴상 등 암각화 주제와 연관된 유물의 시대가 모두 신석기인 것이 증거로 거론된다.

반구대 암각화, 즉 대곡리 암각화가 지금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울산의 식수인 사연호 수위에 따라 암각화가 물에 잠겼다가 노출되는 일이 반복되면서 급속히 훼손되고 있다. 울산시는 암각화를 볼모로 잡고 차제에 대구의 운문댐 물을 끌어와 중장기 식수 문제까지 해결하려 든다. 대구시는 취수원을 낙동강 상류로 이전해주지 않으면 운문댐 물을 나눠 줄 수 없다고 하고, 낙동강 상류의 구미시는 자신들에 불똥이 튈까 놀란다.

최근 중앙정부와 해당 지자체가 용역을 통해 해결책을 찾기로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이 암각화에 이목이 재차 집중된다. 용역 결과를 누구 하나라도 승복하지 않으면 사태는 또다시 원점이다.

세계에 암각화 유적이 다수 존재하지만 반구대 암각화처럼 수많은 동물을 종을 구분할 수 있게 상세히 표현한 것은 없다. 인류 최초의 고래 사냥 자취이자 북태평양의 독특한 선사시대 해양문화 유적이기도 하다. 암각화는 지역과 국가를 넘어 세계의 유산인 것이다. 우리는 빛나는 인류 유산을 과연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배한철 영남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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