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48773648 0182018111048773648 09 0905001 5.18.13-RELEASE 18 매일경제 0

[책과 미래] 교수들의 독서

글자크기
매일경제
예전에 직원 면접을 볼 때 감명 깊게 읽은 도서가 '데미안'이면 거의 무조건 탈락시켰다. 사실일 수도 있고, 때때로 그럴듯한 이유도 있지만, 편집자로 살아가긴 어렵다고 보았다. '데미안'이라는 대답은 대부분 고등학교 이후에 거의 책을 안 읽었다는 증거니까 말이다.

2018 책의 해를 맞이해 한 전문지에서 교수 40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독서 관련 설문조사 결과가 소셜미디어에서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다. 교수들 독서 현황과 함께 '추천도서'를 발표했는데, 문제의 '데미안'이 목록에 올랐던 것이다. '논어' '성경' '도덕경' '어린 왕자' 등 단골과 함께 말이다. 1위를 차지한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는 이해가 간다. 최신 베스트셀러 중 그나마 앎의 지평을 확장해 주는 책이니까. 하지만 목록에 자기계발 수준에 불과한 '미움 받을 용기'나 역사 인식에 문제가 있는 '로마인 이야기'가 있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다시 읽고 싶은 책'도 발표했는데, '성경' '삼국지' '논어' '토지' 순이었다. 신앙 때문이라면 '성경'은 독서목록에 들 수 없다. '읽는 기도'는 '독서'가 아니다. 문학비평가 시라이시 요시하루의 말을 빌리면, "텍스트가 인간을 만드는" 종교의 세계를 떠난 인간이 자기 힘으로 삶의 텍스트를 이룩하는 과정이 독서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문학적·역사적 텍스트로 읽는다는 전제에서만 독서에 해당한다. 이 목록에 '고구려' 같은 대중소설이나 '그리스 로마 신화' 같은 편집본이 오른 것은 개인 취향을 고려해도 충격이었다.

고전의 힘을 존중하지만, 두 목록의 진짜 문제는 새로운 책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이다. 책을 잘 읽지 않는 사람들에게 물었을 때 떠오르는 대로 답한 목록과 거의 다르지 않다. 추천도서 대다수는 일정한 지적 수련 없이 읽기 힘든 고전들이다. 교양수업 등을 통해 교사와 함께 학습할 책들이지 알아서 읽으라고 하면 안 된다. 요즈음 도서관에서 호메로스를 강독 중인데, 청중은 주로 책만 사두고 못 읽은 분들이다. 혼자 읽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런 책을 추천하면, 학생들은 독서에서 멀어지기 십상이다.

추천도서는 삶의 문제를 다루면서도 격조 있는 사유와 우아한 문장을 구사하는 현대 소설이거나, 학습과 연계되어 있으면서 학생들 시야를 넓혀주고, 다른 학문에 대한 호기심을 품게 하는 책이면 좋다. 책을 자주 읽는 사람들은 주로 이런 책을 추천한다. 하지만 목록에는 거의 없었다. '교수들, 신간을 정말 안 읽는구나!'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슬픈 일이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