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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6 (화)

[강천석 칼럼] ‘경제를 실험했다.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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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서에서 무서운 건 病名보다 ‘너무 늦었다’는 의사 所見

대통령 親衛 세력 생각 이대로면 부총리·정책실장 교체 헛일

조선일보

강천석 논설고문


문재인 대통령은 작년 5월 21일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을 직접 발표했다. 대통령은 “일자리를 만들고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이 새 정부의 가장 중요한 국정 과제”라며 인선 배경을 설명했다. “경제 사령탑인 경제부총리는 위기 관리 능력과 과감한 추진력을 높이 샀고, 정책실장은 경제 불평등 문제를 오래 연구한 학자와 실천 운동가로서 재벌-대기업 중심 경제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사람 중심,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 산업 정책과 경제 민주화, 소득 중심 성장을 함께 주도할 최고 적임자로 판단했다.”

대통령의 사람 보는 눈이 잘못됐던 것일까. 과감한 추진력과 화려한 경력이 돋보이는 최고 적임자를 골라 팀을 짰다는데 출범 1년 반이 지나 받아든 경제 성적표는 초라했다. 대통령이 새 정부의 가장 중요한 국정 과제로 꼽은 '일자리 만들기' 과목과 '경제 활력 북돋우기' 과목은 완전 낙제(落第)다. 예보(豫報)는 내년은 더 춥고 어두우리라고 한다. 터널의 출구 부근이 아니라 입구 근처를 헤매고 있다는 말이다.

현 사태가 전적으로 경제부총리와 정책실장의 잘못 때문이라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두 사람 모두를 교체하면 희망이 보일 테니 말이다. 떠도는 이야기처럼 두 사람의 불화(不和) 탓이 크다 해도 어렵지 않다. 어느 한쪽 또는 양쪽 다 내보내면 풀릴 일이다. 사정은 그렇게 녹록지가 않다.

두 사람 허물이 작지는 않다. 경제부총리는 최저임금 인상, 근로시간 단축, 법인세 인상, 부동산 대책, 탈(脫)원전 에너지 정책 등 여러 사안(事案)에 대해 상당 부분 국민과 걱정을 함께했다. 그러나 '형식상' 그가 주도해서 내린 정부 결론은 늘 국민 기대의 반대쪽이었다. 경제 사령탑이라지만 권력 내부에선 '소수(少數) 의견'이었다는 뜻이다.

경제부총리가 경제 사령탑이 아니었다면 그 역할을 대신할 사람은 청와대 정책실장밖에 없다. 그는 국민의 미움 살 말을 도맡아 쏟아내 정권의 욕받이 구실을 톡톡히 했다. 소득 주도 성장론이 선밥처럼 덜 익은 이론이라고 입을 모을 때 '소득 주도 성장을 더 속도감 있게 밀고 나가자' 했다. "한국 경제 수준에선 2%대 성장도 낮은 게 아니다"도 그 연속이다. 결정적 한 방은 '작년(2018년분) 최저임금이 16.4%나 오른 데 나도 놀랐다'는 발언이었다. 인터넷엔 '차라리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라'는 욕설 글이 수백 개 올랐다. 경제 사령탑 같기도 하다.

그러나 수상하다. 경제부총리와 정책실장은 현 정권에 지분(持分)이 없다. 선거 공약 만드는 데도, 자문교수단에도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더구나 정책실장은 대통령과 날 선 관계인 안철수 진영에서 활동했다. 두 사람 다 임명 직전에 대통령과 초대면(初對面)한 사이라고 한다. 정당 특히 현 집권 세력 같은 집단에선 위계(位階)의 높낮이보다 한솥밥 먹은 햇수가 말을 한다. 전대협 몇 기(期) 의장단 출신이냐가 중요하다. 더부살이 처지에선 실세(實勢)가 될 수 없는 구조다. 정책실장이 '왕(王)실장' 모자를 잠시 쓰는가 했더니 어느새 부동산과 탈원전 에너지 정책을 주물렀던 도시공학(工學) 전공의 사회 수석이 '왕(王)수석' 모자를 차지했다. 이게 현 정권 체질이다.

사태를 정리하면 경제부총리와 정책실장 관계에선 부총리가 밀렸을 것이다. 대통령과의 접근 거리, 접촉 기회에서 정책실장이 압도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이다. 청와대 안에선 정책실장이 한솥밥 먹은 햇수가 비교가 안 되는 일부 수석·비서관·행정관을 통솔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거부권(拒否權)을 행사할 수 있는 집단이다.

노동 개혁이 개혁의 전부는 아니지만 노동 개혁 없이 경제가 회생(回生)한 나라가 없다. 경제부총리와 정책실장은 훤히 알면서도 노동 개혁의 '노(勞) 자' 한번 꺼내지 못하고 물러나게 됐다. 청와대 점령 세력과 그들의 여의도 연합군 눈치를 봐야 했기 때문이다. '경제 위기가 아니라 경제에 관한 정치적 의사 결정의 위기'라는 부총리의 마지막 일성(一聲)을 씹어보면 그 뜻이 우러난다.

진단서(診斷書)에서 무서운 대목은 병명(病名)이 아니다. ‘너무 늦었다’는 의사 소견(所見)이다. 한국 경제는 ‘너무 늦었다’ 쪽으로 다가서고 있다. 이젠 시간과의 경쟁이다. 청와대 점령군과 여의도 연합군 생각을 바꿀 사람은 대통령밖에 없다. 먼저 대통령 생각이 근본부터 변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 정권 비명(碑銘)의 경제 대목은 단 두 줄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경제를 실험(實驗)했다. 실패했다.’

[강천석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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