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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후진국형 비리’의 씁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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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때 한 달간 유럽 배낭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여러 나라 중 독일에서 가장 큰 문화충격을 받았다. 지하철을 타려고 역 안에 들어갔는데 표를 파는 역무원이 따로 없었다. 여행 책 안내에 따라 자동판매기에서 표를 샀다.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교통카드를 찍는 곳도, 개찰구도 없었다.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열차 안에서 표를 검사하는 일도 없었다. 하루를 그렇게 보내고 나니 돈이 아까운 마음에 ‘표를 꼭 사야 할까’ 하는 못된 마음이 들었다.

다음날 유학 중이던 친구를 만났다. 그는 “불시 검문을 하는데 걸리면 수십배를 내야 한다. 그냥 표 사서 타라”고 했다. 몇 푼 아까웠지만 친구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런데 그 열차 안에서 실제 검문 장면을 목격했다. 친구는 “독일 시민들은 잘 지키는데 가끔 관광객들이 걸리곤 한다”고 귀띔했다. 검사에 안 걸리더라도 잘 지키는 독일인들의 시민성에 놀랐다. 서로 간의 신뢰가 두터웠고, 신용이 밑바탕에 깔려 있는 사회라는 점에서 우러러보게 됐다.

세계일보

최형창 정치부 기자

지난해 이맘때 특별기획취재팀에서 ‘시민성’ 배양을 위한 기획기사를 썼다. 국정농단 세력에 맞서 촛불을 들어 정권교체를 이뤄낸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시민들이 정작 평소에는 ‘나와 내 가족만 잘되면 된다’는 이기심이 적지 않아 쓴 기사였다. 취재 과정에서 들여다본 대한민국은 ‘거대 적폐’에는 손가락질하면서 정작 스스로는 ‘생활 속 적폐’를 일삼고 있는 사람이 꽤 많았다.

1년 만에 다시 기사를 읽어 본 이유는 최근 드러난 일부 사립유치원들의 비리행태와 공공기관 고용 세습 문제에서 ‘생활 속 적폐’를 발견해서다. 두 사안은 다르지만, 행위자들의 이기심과 욕심에 의해 벌어진 일이라는 본질은 같다. 아이들을 위해 쓰라고 나라에서 준 돈을 일부 원장들은 명품백을 사는 데 썼다. 지금도 한국유치원총연합회 측은 잘못을 인정하는 것 같다가도 ‘사유재산’이라고 주장하며 법적 문제가 없다는 주장을 되풀이한다.

사립유치원이 현행법상 사유재산에 속할 수 있지만 나라에서 혈세를 지원해줄 때 이를 사적으로 유용하라고 한 적은 없다. 교육당국이 지원을 해줄 때는 그만큼 각 유치원 원장들을 믿고 맡겼을 것이다. 그런데 허술한 감시를 틈타 지나치게 사익을 추구했고, 결국 비리가 세상에 드러나자 이들의 신뢰는 바닥으로 추락했다. 신뢰가 떨어지면 감시와 제도 보완에 더 많은 비용이 들게 된다.

공공기관 ‘고용세습’도 마찬가지다. 정규직 전환의 기회가 생기자 먼저 정보를 입수한 내부자들은 가까운 가족, 친척들부터 밀어넣었을 가능성이 크다. 결국 친인척을 집중 채용한 정황이 드러났고 전체 공공기관에 걸쳐 실태를 조사하고 있다. 일부 사기업에서도 여전히 ‘현대판 음서제’를 시행 중이다. 이 역시 ‘나와 내 가족만 잘되면 된다’는 식의 전형적인 후진국형 비리다.

우리 사회가 좀 더 성숙해지면 달라질까. 위와 같은 비리는 개인이 아니라 주변과 사회 전체를 생각했다면 절대 나올 수 없는 행동들이다. 시민 하나하나가 의식이 깨어 사회가 바뀌면 가장 좋겠지만 단기간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이슈 터질 때만 큰소리치지 않고 법과 제도가 제대로 바뀔 때까지 관심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

최형창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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