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5 (목)

[여적]1차 대전 종전 백년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불가피했던 것은 아니다. 피할 기회는 많았다.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세르비아 청년에게 저격당했을 때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의 요구 조건을 모두 수용했다. 이 때문에 독일 황제 카이저 빌헬름 2세조차 “전쟁의 이유는 모두 사라졌다”고 했다. 그럼에도 오스트리아는 베오그라드를 포격했다.

당시 유럽 각국의 왕실은 혈연으로 얽혀 있었다. 바버라 터크먼의 <8월의 포성>은 1910년 5월 영국 에드워드 7세 장례식 장면을 통해 그들의 관계를 잘 드러냈다. 장례식에 참석한 빌헬름 2세는 “이곳이 나의 고향이고, 내가 이 왕족의 일원이라는 것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에드워드 7세는 그의 외삼촌이다. 스페인 왕은 에드워드 7세의 조카사위, 덴마크 국왕은 처형, 노르웨이 국왕은 처조카다.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는 조카, 루마니아 왕비는 조카딸이고 그리스 왕과도 친·인척 관계다. 1차 대전은 가족 간 살육전이었다.

그때 유럽에는 국가를 뛰어넘는 형제애로 무장한 사회주의 정치세력이 성장하고 있었다. 국가 간 경제적 상호의존도 심화되었다. 적국에 투자하고 적국의 재산을 소유한 이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기어코 전쟁을 했다. 1914년 8월1일 주러 독일 대사는 러시아 외무장관에게 선전포고문을 전달했다. 장관이 “천벌이 내릴 것이오” 하자 대사는 울음을 터뜨렸고, 장관은 그의 어깨를 토닥거리다 포옹을 했다. 전쟁이 시작되자 작가들이 나섰다. 독일의 토마스 만은 “최고의 민족이 최고의 권력을 갖고 모든 것을 지배해야 한다”고 했다. 영국의 조지 버나드 쇼는 “백해무익한 괴물 독일 군국주의와 맞서 싸워야 한다”고 했다.

서로 참호에서 대치하고 있다가 죽을 줄 알면서도 ‘돌격 앞으로’ 하는, 병사들의 생존기간이 5일이라는 말이 나돌았던 전쟁이 끝난 지 100년이다. 세계 지도자들이 1918년 11월11일 종전을 기념해 파리에 모인다. “전쟁을 끝내는 전쟁”이라고 했던 H G 웰스의 기대와 달리 세계는 또 한번의 대전을 치렀고, 한반도에서도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했다. 두번의 대전을 치른 유럽이 평화를 자축하는데 65년이 지나 종전선언도 못한 한국인은 언제 그런 호사를 누릴까? 설마 100년째는 아니겠지.

이대근 논설고문

▶ 경향신문 SNS [트위터] [페이스북]
[인기 무료만화 보기]
[카카오 친구맺기]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