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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더 많은 엘사와 모아나가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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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아이가 친구의 생일파티 초대장을 가지고 왔던 날, 무슨 선물을 손에 들려보내면 좋을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너무 비싸서 부담스러우면 안될 것이고, 그렇다고 허접스러운 물건은 아니었으면 좋겠고, 무엇보다 받는 아이가 좋아할 만한 센스있는 선물은 과연 무엇인지 결정 내리기가 꽤 어려웠다. 더군다나 아들만 기르는 나로서는 그 나이대 여자아이들이 뭘 좋아하는지 당최 알 수가 없어 고민을 거듭하다 육아선배들로부터 가볍게 읽을 만한 단행본 만화책을 추천받았다. 그자리에서 포장도 할 겸 내용을 조금이라도 보고 고르는 편이 낫겠다 싶어 서점에 가서 둘러보기 시작했는데 한 시간 가까이 시간을 투자했지만 마땅한 책을 찾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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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 일학년 정도를 겨냥한 수많은 핑크색 만화책이 책장에 빽빽하게 꽂혀있었지만 내용들은 하나같이 거기서 거기였다. 공부 잘하는 법, 사랑받는 법, 예뻐지는 법. 출판사마다 약간씩 다른 부분도 있었지만 크게 이 내용에서 벗어나질 않았다. 특히 고작 일고여덟 살 된 아이에게 남자 아이들이 좋아할 말을 익히게 하고, 생글생글 웃으며 참고 양보하고 또 참아야 남자아이에게 인기를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책이 왜 이만큼씩이나 필요한지 심히 당혹스러웠다. 나는 허리가 굵은지, 허벅지가 굵은지 알아두고 거기에 맞는 옷차림을 할 줄 알아야 된다거나 향수 쓰는 법, 살 빼는 법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는 책을 정말이지 여덟 살 아이에게 생일선물이라고 내밀고 싶지 않았다. 결국 아쉬운 대로 만화책 대신 지금 읽기에는 글자가 좀 많다 싶은 여성위인에 대한 책을 집어 들고나오며 마음이 복잡해졌다. 우리는 지금 딸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을까.

한편에서는 여성 서사에 대한 요구가 어느 때보다 강하게 빗발친다. <미쓰백>처럼 여성에 의한 여성 이야기가 입소문을 타고 있으며 아예 자신을 ‘쓰백러’로 지칭하는 팬덤까지 등장했다. 그간 영화에서 숱한 남자 주인공들이 불의에 맞서 싸우고 진실을 찾기 위해 몸을 던졌지만 여성 등장인물들은 묵묵히 밥을 지으며 주인공을 기다리거나, 시체로 발견되거나, 성적 대상으로 이용되는 정도가 고작이어서 스스로의 욕망이나 주변인들과의 관계는커녕 이름조차 갖지 못한 채 화면에서 사라져왔다. 그리고 이런 문화 코드에 지친 사람들은 넷플릭스 같은 새로운 플랫폼으로 떠나거나, ‘쓰백러’와 ‘허스토리언’이 되어 선택 소비를 하거나, 스스로 창작자가 되어 활동을 시작했다. 보여지는 존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은 원래부터 발화하고 행동하고 성장하는 존재였음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렇게 전에 없던 새로운 웹툰이 올라오고, 책이 출판되고, 예능프로그램을 진보시키며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는데 왜 아직도 ‘유아동’ 콘텐츠에는 변화의 바람이 닿지 않는 것일까.

2003년 처음 등장했던 뽀로로는 뽀로로, 에디, 크롱이 밖에서 뛰어노는 동안 루피가 집에서 빵이나 쿠키를 구워 대접하는 식의 패턴이 반복되며 성별 고정관념을 재생산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리고 10여년이 지난 지금 새롭게 등장한 애니메이션은 좀 달라졌길 바라지만 여전히 그 수준이다. 핑크퐁이 영미권의 구전동요 ‘baby shark’를 리메이크해서 만든 동요 ‘아기상어’에는 ‘어여쁜’ 엄마 상어, ‘힘이 센’ 아빠 상어와 같은 원작에 없던 수식어가 붙었다. 노래의 흐름이나 분위기상 전혀 필요하지 않은 단어를 왜 꼭 한국어 버전에만 굳이 집어넣었는지 궁금하다.

스스로 왕국을 세우겠다는 <겨울왕국>의 엘사, 바다로 나아가며 성장하는 <모아나> 같은 캐릭터가 나오는 만화, 책, 영화가 더 많아질 수는 없을까. 마음놓고 아이들과 즐길 만한 콘텐츠가 정말이지 간절하게 필요하다. 작정하고 찾지 않아도 말하고 행동하고 성장하는 여성 롤모델을 어디서나 만날 수 있다면 아이들의 세계는 분명 더 넓게 열릴 텐데 말이다.

김민지 풀뿌리 여성주의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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