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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여곡성, ‘아날로그 리메이크’로 더 무서워진 ‘하우스 호러’ 명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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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1986년 추억의 공포영화 리메이크

’자유로운 현대풍 사극’ 좇지 않고

‘사극의 충실과 절제’ 오히려 신선

억울한 여인 원혼 풀이와 권선징악

단순한 구도의 틀에 머물러 아쉬움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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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 고지’ 향한 일대 격돌에서 안타깝게도 그 누구도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한 올해 추석 성수기. 그로 인해 이른바 가을철 영화 비수기 특유의 오밀조밀함이 더욱 흥미롭다. 그중에서도 <여곡성>은 호러, 그중에서도 사극 호러, 그중에서도 사극 ‘하우스 호러’(대부분의 사건이 한집안 안에서 진행되는 호러)라는 점에서 발군의 주목성을 보인다.

더욱이 이 영화는 1986년 추억의(또는 전설의) 공포영화 <여곡성>(이혁수 감독, 허성수 각본)의 리메이크다. 1986년은 잘 아시다시피 군사정권이 강요한 소재 제약과 가위질, 그리고 뭐라도 좀 나오려 하면 곧바로 등장하는 희뿌연 모자이크나 가리개용 빨간 하트가 난무하던 시절이었으므로, ‘반사회적’ 향취가 극미량이라도 풍기면 곧장 검열은 물론 개봉 자체의 원천봉쇄는 말할 것도 없는 상황이었으리라는 것은 능히 짐작되리라. 이런 제약이 완전히 제거된 상태로 만들어진 2018년 리메이크는 과연 어떠한 형국일 것인가.

시대물의 사실감이 주는 폐쇄공포감

일단 2018년판 <여곡성>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그런 제약이 제거됐을 경우에 흔히 나타나기 쉬운 자유 범람의 오류, 즉 내게 주어진 이 자유로움을 어떻게든 활용하고 말리라는 의욕에 불타오른 나머지 본질을 망각한 채 자유 누리기 그 자체에 매몰되고 마는 오류가 크게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대사의 어투에서 가장 먼저 보인다. <여곡성>의 대사 어투는, 최근어는 물론 외래어에 영어까지 거침없이 등장하는 현 사극의 주류 풍토가 형성되기 이전, 그러니까 예스러운 어투, 어휘에 대한 추구를 기본으로 삼던 20세기 표준을 준수하고 있다.

물론 모든 사극이 엄격한 시대 고증을 따를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타 장르와 접붙이기된 고예산 대박지향적 영화가 대부분이었던 최근 개봉 사극들에서 등장했던 천민, 상민, 양반, 왕족 구분이 전혀 없는 현대어다운 말투는 이제 신선하지도 흥미롭지도 않음과 동시에, 오히려 사극 고유의 재미인 신분 구분에 의한 긴장을 손도 대지 않은 채 내버린다는 측면에서 알맹이도 실익도 없는 설정이었다. 해서 그 반대로 가는 시도, 예컨대 <사도>(이준익 감독)가 <한중록>의 어투와 구절을 고스란히 영화로 옮겨온 시도는, 대부분의 21세기 사극들이 습관적으로 채택한 자유를 버리고, 역으로 사극의 제약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오히려 큰 신선함을 안겼다.

같은 원리로 1986년 원작의 어투에 충실해지려 한 <여곡성>도 유사한 효과를 얻는다. 특히 1986년판의 대사가 그대로 다시 등장하는 시어머니 신씨 부인의 “어미의 고육지계란다” 같은 대사라든가, 하인인 여주댁의 “속살은 실하고 두리둥실한 것이” 등등의 대사들이 내는 사극 맛은 확실히 최근에는 드물어진 구수함이다.

이런 사극적 사실감이라는 방향은 미술이나 의상 등의 시각적인 부분에서도 그대로 이어지는데, 이는 이 영화의 핵심 기능성 중 하나인 공포감의 강화라는 면에서도 타당해 보인다. 보통 사극 공포물이 주는 공포의 밑바닥에는 ‘꼰대’로 압축되는 자폐적, 독선적인 사고, 문화, 제도가 주는 폐쇄공포가 깔리기 마련인데, 당연한 말이겠지만 사건이 벌어지는 공간(더 정확히는, 영화가 사건과 인물들을 ‘가둬두는’ 공간)은 영화 밑바닥에 깔린 세계관에 대한 물리적 표현에 불과하다. 그 표현이 성공적인 경우 공간이 인물들에게 주는 폐쇄공포는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이되는데, 우리는 예컨대 70년대에서 시간이 멈춰버린 폐정신병원을 통해 박정희 시대를 계속해서 인용하고 상기시켰던 <곤지암>에서 그런 유의 공포를 실컷 맛본 바 있다.

<곤지암>의 정신병원만큼 전면에 나서지는 않지만 <여곡성>에서 사대부 댁 기와집의 사실적 미술도 역시 폐쇄공포를 부추긴다. (아, 물론 이 사대부 댁 기와집의 방바닥들에는 카슈미르풍의 문양 화려한 카펫들이 깔려 있긴 하다만, 뭐 그 정도는 워낙에 한정된 공간을 배경으로 하다 보니 시각적 따분함을 극복하기 위한 고육지계였다고 퉁치자.) “절대 이 집 밖으로 나서지 마라”는 시어머니 신씨 부인(서영희)의 대사로 선언되듯이, 이 영화의 집은 적어도 자동차와 아파트와 인터넷과 핸드폰이 없을 뿐 현대와 별반 차이 없는 그런 곳은 아니다. 그곳은 ‘대 잇기’ ‘천출’ ‘씨받이’ ‘일부종사’ 같은 말들이 지배하는 곳이고, 집의 사실적 비주얼은 그 말들에 실물적인 힘을 얹어놓는다.

또 하나, 이 리메이크가 1986년 원작의 아날로그적 기법에도 존중을 보내고 있는 점 또한 거론할 만한 부분이다. 보란 듯이 대거 컴퓨터그래픽(CG·시지)을 앞세우는 대신 강한 콘트라스트의 조명(특히 1986년 버전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빨간 조명)과 스모크의 적극적인 사용, ‘귀신’의 특수분장 등등 80년대를 풍미했던 하우스 호러 <이블데드>(1981)의 시각효과들을 한국화한 듯한 1986년판의 정취를 최대한 살린 2018년판의 접근법은 시지 범람의 시대에 오히려 참신해 보인다.

물론 2018년판이 1986년판의 그 유명한 ‘지렁이 국수 먹기’ 장면의 재현을 위해 당시처럼 실제로 살아 있는 지렁이를 먹는 등의 극아날로그적 기법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32년 전과는 달리 2018년의 대감마님은 다행히도 시지 지렁이를 드시는 호사를 누린다. ‘사라지는 상처’ ‘팝콘 닭’ 장면 등은 물론, 먹물 같은 어둠을 만드는 등등 눈에 띄지 않는 부분에서도 리메이크 판은 시지에 빚지고 있다. 하지만 남발되지는 않는다(미야자키 하야오의 표현을 빌리면 ‘예절 바른 시지’). 덕분에 고품질 시지를 잔뜩 쏟아붓고도 오히려 상상의 여지만 없애고 마는 고예산 영화들보다 이 영화가 조명, 스모크 등을 이용해 보여주는 아날로그 기법들은 훨씬 더 효과적으로 보인다(가성비 면에서 특히나).



새 등장인물 ‘해천비’의 캐릭터 달랐더라면

그렇지만 이런 기본의 충실과 절제라는 접근이 (역으로) 신선해 보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형식에 해당하는 부분까지다. 억압의 피해자이자 동시에 가해자인 여성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공포영화 <여곡성>의 리메이크는, 수많은 정치 지향적 영화들이 ‘외부의 적’으로 간편하게 타자화시켜 밀쳐두는 우리 의식 밑바닥의 어둠을, 장르의 칼날을 빌려 더 깊숙이 파고들 기회일 수 있었다. 더불어, 남성우월사회의 만성화된 폭력이 작동되도록 하는 역사적·제도적 뿌리를 호러에서만 가능한 방식들(진혼, 죽은 자의 신원, 산 자에 대한 가차 없는 폭력 등)을 빌려 속시원하게 단죄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2018년의 <여곡성>은 그 가능성에 손을 뻗지 않는다.

물론 32년간 쌓인 먼지를 걷어내는 작업은 시청각적 부분 못잖게 내용적인 면에서도 깔끔하게 이뤄져 있다. 번듯한 풍채와 성정을 한 채 집안의 장래에 대한 대승적 근심의 발로로 머슴의 색싯감을 아무 죄의식 없이 취하는 1986년의 ‘도련님’을, 세상의 이치를 무시한 채 돈과 권세의 알량함에 취해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야비한 스포일드 차일드로 바꾼 것부터, 자애롭고 인자하던 시어머니 신씨 부인이 악령에 씐 뒤 표독스럽고 괴이하게 변하는 설정을 그 반대, 즉 냉정하고 쌀쌀맞던 시어머니가 다정하게 변하는 것으로 바꿔놓은 설정까지(권위와 폭력이 뇌수까지 배어 있는 인간의 돌연한 개과천선만큼 섬뜩한 것도 없다), 2018년판의 정서는 현재에 맞춰 적절히 튜닝되어 있다.

하지만 영화는 결국 억울한 죽임을 당한 한 여인의 한풀이와 그 죽음을 부른 자에 대한 권선징악적 징벌이라는 틀에 끝내 머물고 만다. 영화 초반, 시어머니 1인과 3명의 며느리 사이에서 흥미롭게 전개될 듯하던 이합집산과 권력 암투도 결국 단순 질투와 위계 다툼 정도의 수준에서 멈춘다. 아쉽기 그지없게도.

특히나 아쉬운 대목은 1986년판에 없는 캐릭터인 박수무당 ‘해천비’(이태리)의 캐릭터다. 유독 튀는 퓨전사극풍 의상과 헤어 그리고 액션을 선보이는 이 천민 캐릭터가, 자신과 같은 천민 출신 악귀를 상대로 한 화려 액션을 벌이기보다는, 그 악귀를 만들어낸 세상의 근본을 헤집어 보여주는 데 투입되었더라면 훨씬 이유 있는(그리고 현대적인) 캐릭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가능성 또한 끝내 무위로 돌아가고 만다. 하여 그 뒤에 남는 것은 반복되는 깜놀 귀신 장면들과 공허한 유혈이 남기는 멍한 마비감이다. 그것은 성수기 고예산 사극들에서 이미 충분히 보았던 것들임은 물론이다.

한동원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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