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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삶의 창] 네덜란드의 바람이 만든 에너지 / 이길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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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겨레

이길보라
독립영화감독·작가


동생이 사는 서울 집에 다녀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싱크대 위에 놓인 커다란 비닐봉지로 포장된, 마치 선물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이것이 무엇인고? 탐색을 시작했다. 반짝이는 투명 플라스틱 비닐봉지의 밀봉된 부분을 조심스레 열었다. 에어캡으로 최소 두겹은 돌돌 말아 포장한 것 같은 무언가가 잡혔다. 손으로 두세번 돌려 걷어냈다. 그러자 불투명하고 말랑말랑한 재질의 다른 비닐봉지가 나왔다. 손을 갖다 댔다. 그제야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바나나였다! 세상에, 무슨 바나나를 이렇게 포장해서 판대? 깜짝 놀라 동생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물었다. “저 바나나, 네가 산 거야?” 하마터면 오랜만에 만나자마자 잔소리를 하는 못된 누나가 될 뻔했다. 직장에서 직원 복지차 과일을 정기적으로 배송해주는데 벌레가 꼬일 수 있어 저렇게 과도하게 포장을 하여 택배로 보낸다는 것이었다. 바나나도 맛있었고 내 동생 잘 챙겨주는 회사의 복지도 훌륭했지만 그 바나나 한송이 먹겠다고 이렇게 많은 비닐을 사용하다니. 버리는 것도 일이었다. 내가 유학하는 동안 비닐류는 재활용 쓰레기로 버릴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세 종류의 비닐을 버리기 위해 비닐로 된 새 종량제 봉투를 열었다. 비닐이 비닐로 가득 찼다. 헛웃음이 났다.

그건 일본 역시 마찬가지였다. 잠시 들른 일본에서 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편의점에 들렀다. 띵동, 하고 자동문이 열릴 때마다 수많은 음식이 나를 반겼다. 그러나 과도했다. 무언가를 살 때마다 친절하게 챙겨주는 비닐봉지, 일회용 플라스틱 숟가락과 포크, 나무젓가락, 심지어 이쑤시개와 물티슈까지. 엄청난 쓰레기들이 편리함이라는 이름으로 아주 조용히 만들어지고 버려지기를 반복했다. 네덜란드에서 살기 전에는 미처 자각하지 못한 풍경이었다.

유학 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눈에 보인 것은 내가 얼마나 많은 쓰레기를 만들어내는지였다. 외식을 하는 것보다는 간단하게 장을 봐 집에서 요리를 해먹는 이곳에서는 거의 모든 끼니를 해먹는다. 외식비가 비싸기도 하지만 네덜란드 특유의 사회 전반적으로 검소한 분위기가 큰 몫을 한다. 이곳에서 처음 장을 볼 때는 늘 그랬던 것처럼 비닐봉지를 마구 썼다. 감자와 양파를 담을 때도, 사과 두알을 살 때도 그랬다. 그런데 같이 장을 보는 동기들은 한 손에는 사과, 다른 손에는 오이를 들고 계산대에 섰다. 미리 챙겨 온 에코백도 함께였다. 내 감자 깨끗하게 가져가겠다고 덥석 가져다 쓴 비닐봉지가 무색했다. 그때부터 다른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장바구니를 늘 들고 다니고 과일과 채소를 담을 때도 비닐봉지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 종이상자에 담긴 낱개로 포장되지 않은 생리대, 종이컵 대신 집에서 쓰지 않는 머그잔을 기부받아 컵으로 사용하는 학교 카페테리아, 가스와 전기를 공급하는 회사를 선택할 때 큰 가격 차이 없이 선택할 수 있는 100% 친환경 에너지 회사 등.

2019년부터 네덜란드 정부는 에너지세를 대폭 올릴 예정이다. 세금을 올리면 사람들이 에너지를 좀더 절약하고 효율적으로 사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폭이 꽤 크다. 한가구당 연 26만원 정도가 오른다. 정부는 이 세금으로 풍력 에너지 등 친환경 에너지를 지원한다고 한다. 돈이 조금 더 나가더라도 네덜란드의 바람이 만든 에너지로 생산한 전기와 가스를 쓰기로 했다.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세금을 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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