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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너 국적이 어디야?” “한국입니다” 눈물 콧물 ‘줄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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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유엔 국제이주기구 현장안전접근훈련 체험기]

차량습격·무차별 총격·검문소통과…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본능이 지배했다

지난해 공격받은 구호활동가 313명

실제 위협에 준하는 안전훈련 중요성 커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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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차 밖으로 나와! 엎드려!”

탕탕. 탕. 탕탕탕. 총탄 소리가 연이어 들리고 곧 검은 복면을 쓴 무장 괴한들이 도로 양옆 수풀에서 달려 나와 길을 가로막았다. 예상치 못한 습격 상황에 구호물품을 싣고 난민 캠프로 향하던 차량 두 대가 멈춰 섰다. 숲 속에서 무장단체를 맞닥뜨린 구호활동가들은 순순히 무장단체의 지시에 따랐다.

“너 국적이 어디야?”

“…한국입니다.”

“한국인이 여기 뭐하러 왔어? 당장 가방 뒤져서 가지고 있는 것 다 내놔.”

총구가 기자의 몸통을 향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가방을 뒤졌다. 립밤이 든 파우치, 취재 내용을 적은 노트, 목도리… 마침 지갑은 운영본부에 두고 온 참이었다.

“뭐야, 이것밖에 없어?”

“…죄송합니다.”

거칠게 두 손으로 기자의 헬멧을 내리치던 무장대원은 곧 총구를 머리에 겨누며 영어로 ‘땅으로 엎드리라’고 지시했다.

‘시야가 사라진 위협 상황에서는 최대한 청각과 촉각에 의존해라.’ 안전 교육에서 숱하게 배운 내용도 정작 실제 상황에 처하니 기억이 날 리 만무했다. 함께 차를 타고 구호 현장으로 이동하던 9명의 동료들 가운데 이미 대다수는 총을 맞고 숨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30초 정도 엎드리고 있었을까. 무장대원이 또다시 기자의 방탄조끼를 거칠게 잡아채 일으켰다.

“돈 없냐고 돈!”

사실 방탄조끼 안주머니에 휴대전화가 있었다. 하지만 휴대전화는 숨겨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남은 알량한 저항이었다. 무장대원은 다시 기자의 헬멧을 두어 번 내리치더니 거칠게 땅에 무릎을 꿇렸다. 무릎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그렇게 10시간 같은 10분이 지났을까. 차량이 이동하는 소리가 들리고, 곧 옆에 쓰러져 있던 대원이 몸을 일으켜 기자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사람들 다 갔어요. 일어나도 될 것 같아요.”

줄줄 흐르는 눈물 콧물을 닦고 보니 주변 상황은 처참했다. 차량은 뺏긴 지 오래였고, 여기저기 동료들의 신발들이 흩어져 있었다. 동료들의 ‘시체’도 보이지 않았다. 구호활동가 9명 가운데 생존한 사람은 기자를 포함해 단 3명뿐이었다. 함께 살아남은 팀 리더가 위성전화로 본부에 구호 요청을 했다.

“위급상황 발생. 찰리 지점의 난민 캠프로 가던 중 습격을 받았다. 본부 지원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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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호활동가 공격 늘어…안전훈련은 필수

“오케이. 이제 끝났습니다. (Okay, it’s finished.)”

습격 상황을 지켜보던 스티브 매이올 유엔 국제이주기구(IOM) 선임보안작전담당관이 훈련이 끝났다는 신호를 보냈다. 죽은 역할을 했던 동료들은 습격 장소에서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숲 속에서 몸에 묻은 흙을 툭툭 털며 일어났다. “와, 정말 실감 나네요.” “너무 무서웠어요.” 팀 동료가 눈물 콧물로 범벅된 기자의 얼굴을 보더니 놀라서 갖고 있던 물을 건넸다. 물을 마셔도 놀란 마음은 좀체 진정되지 않았다.

16일부터 3박4일 동안 국제평화지원단에서 진행된 유엔 국제이주기구(IOM)의 ‘현장안전 접근훈련’(SSAFE?이하 안전훈련)에 <한겨레> 기자가 직접 참가했다. 현장안전 접근훈련이란 국외에서 인도적 구호 활동을 하는 활동가들이 현지에서 맞닥뜨릴 수 있는 각종 위협 상황을 실제로 실습해, 스스로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하는 훈련이다. 국제이주기구는 2015년부터 미국 국제개발처와 한국 국제평화지원단의 지원을 받아 1년에 한 번씩 안전훈련을 진행하고 있다. 훈련은 현장감을 높이기 위해 국외 파병 교육을 하고 있는 국제평화지원단 소속 장병들이 무장단체 역할을 맡고, 습격 상황은 아무런 예고 없이 교육 도중에 진행됐다.

훈련이 끝난 뒤엔 참가자들이 했던 상황 대처가 적절했는지 평가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여러분이 처한 상황은 습격과 차량 납치 상황이었습니다. 실제로 구호에서는 많은 활동가들이 차량 납치 위협에 시달립니다. 구호 단체의 차량에는 많은 구호물품이 실려 있어 무장단체의 목표물이 되기 때문이죠.”

차량습격 상황이 끝난 뒤 매이올이 말을 이었다.

“중요한 건 무조건 살아남는 것이 우선 순위라는 점입니다. 무장단체의 지시에 모두 따르세요. 만약 귀중품을 숨겼다가 나중에 들키면 적을 도발하는 행위일 수 있어요.”

기자가 휴대전화를 끝까지 숨겼던 행동은 실상 매우 위험한 행동이었다. 어린이재단에서 인도적 지원 분야로 일하고 있는 참가자 유지숙(29)씨는 “지난해 교육 지원 사업차 출장을 다녀왔던 르완다 지역과 습격 현장이 겹쳐져서 더욱 실감 나게 느껴졌다”며 혀를 내둘렀다.

폭탄테러·총격 등 구호 활동가들을 대상으로 한 무장단체의 공격은 늘어나는 추세다. 유엔은 2017년 한 해에만 313명의 인도적 지원 관계자들이 현지에서 공격을 받아 이 가운데 20여명이 숨졌다고 밝혔다. 지난 20년 동안 무장단체의 공격을 받은 구호활동가들은 4132명에 달하는데, 유엔은 2008년부터는 ‘세계 인도주의 날’을 지정해 내전 현장 및 재난 지역에서 인도적 지원 활동을 하다 희생당한 활동가들을 추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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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뢰밭, 무차별 총격…현실감 넘치는 훈련

3박4일 동안 이어진 현장안전 접근훈련의 마지막 훈련은 지뢰밭 상황에서의 응급처치 훈련이었다. 19일 오전, 참가자들은 두 팀으로 나누어 한 팀은 지뢰로 인한 부상자팀, 한 팀은 부상자를 돕는 구조팀 역할을 맡았다. 기자는 부상자 팀에 속했다. 매이올 담당관이 나눠준 명찰엔 기자가 당한 부상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가슴에 관통상으로 인해 호흡이 어려움. 조금씩 의식을 잃고 있음.’ 구조팀은 증상에 맞는 응급처치를 해야 했다.

‘펑-’ 부상자 팀이 이동했던 지뢰밭에서 공포탄이 터지면서 훈련이 시작됐다. “시작했어요! 오스카상을 받을 정도의 연기를 해주세요!” 매이올의 지시에 따라 곳곳에서 부상자들의 신음을 내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호흡도 어려운데 도와달라는 얘기도 못 하겠지.’ 눈을 반쯤 감고 낑낑대며 누워있자 근처에서 훈련하던 구조팀이 응급 키트를 들고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참가자들의 얼굴엔 혼란스러운 모습이 역력했다.

“괜찮으세요? 괜찮으세요?” 관통상 정도라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데도 당황한 동료들은 끈질기게 내 상태를 물었다. 답답한 마음에 내 증상이 적힌 명찰을 손으로 가리켰다.

“아! 관통상이다 관통상! 방탄조끼 풀고 압박 붕대로 지혈할게요!”

5분여가 지났을까. 매이올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케이, 끝났습니다!”

복습의 시간이 돌아왔다. 매이올은 참가자들의 대처에 문제가 없었는지 꼼꼼히 짚었다.

“우선, 응급조치팀은 부상자들이 무엇 때문에 부상을 입었는지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지뢰로 인한 부상이라는 점을 확인하지 않으면 도와주러 온 활동가들이 부상당할 위험이 높아져요.”

정확한 지적에 참가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또한 의료팀은 가장 소리를 크게 지르고 있는 참가자인 닉에게 가장 빠르게 달려갔습니다. 닉, 본인이 당한 부상이 뭐였죠?”

“손가락이 세 개 부러졌어요.”

닉의 대답에 참가자들의 웃음이 터졌다.

“닉의 경우처럼 대부분 가장 크게 소리를 지르는 사람은 가장 적은 부상을 입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크게 다친 사람은 의식이 없어요. 크게 다친 사람부터 분류해 가장 먼저 조처하는 것이 필요…”

“탕! 탕탕!”

메이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참가자들이 모여있던 건물 입구에서 또다시 총성이 들렸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무차별 총격’ 상황이 시작된 참이었다. 당황한 것도 잠시, 참가자들은 빠르게 이동해 교실 앞문과 뒷문을 소파?책상 등의 물품으로 막았다. ‘헬멧! 헬멧!’ 잠깐 벗고 있던 헬멧을 다시 찾아 머리에 뒤집어썼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 본능이 앞섰다.

출구가 막히자 3명의 괴한들은 복도 쪽으로 난 창문으로 침입을 시도했다. 무차별 총격 대응의 기본 원칙은 ‘도망가라, 숨어라, 싸워라’(Run, Hide, Fight)다. 참가자들은 창문으로 진입하는 괴한과 가장 마지막 단계인 격투를 시작했다. 총을 든 괴한이 참가자들에게 제압되고 나서야 무차별 총격 상황이 종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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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련 큰 도움…현지에서 의미있는 활동 하고파”

안전훈련을 진행한 스티브 매이올 담당관은 구호활동가 안전 교육의 베테랑이다. 지난 7년 동안 매이올 담당관의 훈련 과정을 거친 구호활동가들만 4500여명에 달한다. 올해 한국에서 열린 훈련에는 세계식량기구, 어린이재단 등의 단체를 포함해 모두 20여명의 구호활동가들이 참석했다. 매이올은 “현지에서 일하는 구호활동가들이 늘어나는 만큼 이들을 안전을 보호하는 교육의 중요성도 커지고 있다”며 “국제구호단체의 자체적인 훈련뿐만 아니라, 국가적인 지원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국외 구호 현장에 나갈 예정인 참가자들도 모두 안전훈련이 유용했다고 입을 모았다. 국제이주기구에서 일하고 있는 임형빈(26)씨는 다음 달 소말리아 현지에 파견돼 구호활동을 할 예정이다. 내전과 무정부 상태의 소말리아는 여행금지국가로 지정될 정도로 위험한 국가다. 임씨는 “원래 구호정책에 관심이 많았는데, 올바른 정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현장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소말리아 현지 구호활동을 지원했다”고 했다. 세계식량계획에서 일하고 있는 최수아(29)씨도 “위협 훈련을 계기로 구호활동의 중요성과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고 말했다.

이번 훈련에는 이듬해 레바논 파병이 예정된 국제평화지원단 장병도 일부 참여했다. 김대섭(29) 대위도 그 중 한명이다. 김 대위는 “차량 납치 훈련의 경우 실제 파병 부대에서 진행하는 우발상황조치훈련에 준할 정도로 생생했다”고 말했다. 김 대위는 “내년 4월에 레바논으로 8개월간 파병이 예정되어 있는데, 유엔이 개발해온 위기상황 대처 매뉴얼을 배우고 싶어 이번 훈련에 참여했다”며 “특히 인질 상황은 군인들도 맞닥뜨릴 수 있는 상황이라 매우 유용했다”고 말했다.

전체 훈련을 조율한 국제평화지원단 김민성 대위는 “평화유지군은 분쟁지역에서 민간인들이 위험에 빠졌을 때 이들을 구출시키는 역할도 한다”며 “실제로 민간인들과 함께 훈련하는 것은 파병이 예정된 군인들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덧붙였다.

황금비 기자 withb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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