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4 (수)

“임금 체불을 고발합니다” 배우가 카메라를 들었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웹드라마 ‘행복한 인질’ 제작사, 배우·스태프 50명분 임금 ‘먹튀’

구두계약 관행, 노동부는 ‘뒷짐’

곽민석씨 “갑의 방송” 다큐 기록

경향신문

웹드라마 <행복한 인질>의 출연진이 지난해 촬영 당시 찍은 단체사진. 이들은 촬영이 끝난 뒤 1년이 넘도록 임금을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유튜브 캡처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배우가 카메라를 들었다. <행복한 인질> 배우 곽민석씨(48). 작품 주제나 형식은 남다르다. 자신이 출연한 웹드라마의 임금 체불 문제가 주제다. 스마트폰 카메라로 다큐멘터리를 촬영했다. 임금을 받지 못한 배우와 제작진 이야기를 담았다. 10분 남짓한 영상엔 방송인을 가난과 스트레스로 몰아넣는 한국방송의 제작 현실이 압축됐다.

제작 PD로 참여한 김부영씨(23). 처음엔 꿈만 같았다. 방송일이 좋기만 했다. 지난 22일 경향신문과 만난 그는 “대학에서 영상을 열심히 공부했다. 스태프로 이름을 올리곤 꿈을 이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무명 배우 ㄱ씨도 옥탑방에 살며 연기자의 꿈을 키웠다. 출연료 10만원에도 한걸음에 내달려 촬영에 임했다. “드라마를 만들 수만 있다면….” 여러 배우와 스태프가 적은 임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촬영장으로 달려왔다.



제작사 대표 ㄴ씨는 큰소리쳤다. “ ‘제국의 아이들’의 김동준이 주연으로 출연하기 때문에 중국에 판권을 팔 수 있다”며 드라마가 성공할 것이라고 했다. 자신이 과거 부사장으로 이름만 걸어둔 대형 제작사를 들먹거리며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촬영 현장은 예상과 빗나갔다. 새벽 4시부터 자정까지 20시간 근무에 3시간 쪽잠, 다시 새벽 4시부터 자정까지 이어지는 종일 노동. 서울과 강원도를 오가며 주먹밥을 먹었다. 주먹밥은 촬영 현장에서도 주식이었다. 스케줄은 빡빡했다. 촬영 현장 섭외도 촬영 5시간 전까지 확정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근로계약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대부분이 구두 계약이었다. 소속사가 있는 배우나 경력이 있는 스태프들만 계약서를 썼다.

곽씨가 말했다. “그래도 찍을 때는 행복했어요. 드라마가 알려지면 너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최선을 다했죠.” 열악한 노동 환경을 버티며 2016년 9월 말부터 10월 초까지 9회차를 촬영했다. 제작사는 임금을 주지 않았다. ㄴ씨는 “예고편을 만들어 판매해 투자금이 돌아와야 임금을 줄 수 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받지 못한 총 임금은 2억여원에 달했다. 일부 제작진이 자비로 들인 촬영 관련 비용은 제외한 액수다. “미안하다.” 제작사 측은 이 말 한마디를 남기고 잠적했다. 배우·제작진은 <행복한 인질>의 인질이 돼버린 것이다.

■ 계약서 쓰면 뭐하나 ‘휴지조각’ 신세

경향신문

웹드라마 <행복한 인질> 제작사의 임금 체불 문제를 주제로 다큐멘터리를 만든 배우 곽민석씨(왼쪽)와 드라마 제작 PD 김부영씨가 22일 경향신문과 인터뷰한 뒤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김기남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작성한 계약서도 무용지물이었다. ㄴ씨가 잠적한 뒤 임금을 받지 못한 약 40명이 지난해 7월 고용노동부 서부지청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노동부 측은 “정당한 계약서가 아니어서 조치해줄 게 없다”고 했다. 김부영씨 체불액은 200만원이다. 김씨는 “대표가 ‘미안하다. 이른 시일 내에 주겠다’는 문자메시지에다 서명하고 대표 도장이 찍힌 계약서를 제시했지만 인정이 안된다고 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이 일로 드라마계를 떠났다. “이제 정식 계약서를 쓴다고 해도 신뢰가 가지 않아요. 현실이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게 됐기 때문이죠.” 450만원을 받지 못한 곽민석씨도 “근로시간을 인정받아 오라고 했다. 촬영은 출퇴근 개념이 아니라 근거자료를 찾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더 이상 항의할 데도 없다. ‘한류’다 하지만, 한국 방송판은 ‘좁은 동네’다. 곽씨가 말했다. “밀린 임금을 달라고 하면 제작사가 나쁘게 소문을 내면 어떡하나 이걸 먼저 걱정해요. 이 업계에서는 소문이 중요하니까요. 제작사도 이를 잘 알고 악용합니다.” 드라마 출연 배우 대다수가 인터뷰를 거절했다.

김씨가 말했다. “이런 일이 일어나도 쉬쉬해요. 잘못 말하면 다른 작품을 못할까 봐 그런 거죠. 어그러진 작품이 많을 겁니다. 다 두려움 때문에 묻어뒀을 거예요.”

웹드라마는 예고편만 만든 채 묻혀졌다. 배우와 제작진에게 남은 일은 부당한 드라마·영화계 촬영 현실을 알리는 것뿐이다. 주변 배우들의 조언으로 곽씨가 카메라를 들었다. 같은 생각을 가진 김씨를 비롯해 10여명의 제작진이 인터뷰에 응했다. 체불 여파는 계속된다. 조명감독 김남원씨는 카드 대출을 받아 후배들 임금을 챙겨줬다. 그는 다큐멘터리에서 “카드 대출이 남아 있다”고 전했다.

이들은 한국 드라마·영화 제작 현실의 악습이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는 데 입을 모았다.

곽씨가 말했다. “제작사는 임금을 주지 않고도 다른 제작사를 차리고 활동하면 돼요. 스타 작가, 스타 배우와의 친분을 내세우며 투자자 돈을 모으기는 쉽죠. 수많은 무명 배우들과 제작진의 노력이 제대로 보상받으면 좋겠어요.” 김씨도 “단 5분만 나오는 단역 배우도 당당히 인정받는 계약서를 쓰고, 그 계약서대로 대우받기를 바란다”고 했다.

아마추어 감독이 스마트폰으로 만든 다큐멘터리는 세련되지 못하다. 메시지만은 명확하다. “모든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책임을 다하면서 끝까지 행복할 권리가 있었지만 임금 체불로 행복할 권리는 사라졌다. <행복한 인질>의 모든 촬영 참여자가 제목처럼 삶의 행복을 완성할 날이 찾아왔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이보라 기자 purple@kyunghyang.com

▶ 경향신문 SNS [트위터] [페이스북]
[인기 무료만화 보기]
[카카오 친구맺기]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