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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6 (화)

[이슈추적] 이란의 유령 유조선이 떠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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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제재 이후 이란 유조선 추적장치 차단

“페트로 달러 동날 경우 민심 흉흉해질 것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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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안해에서 순찰하는 이란혁명수비대 보트 뒤로 한 유조선이 지나가고 있다.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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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중동의 주요 석유 수송로인 호르무즈해협(페르시아만과 오만만 사이 해협)을 향하던 이란 초대형 유조선 ‘해피니스 1(이하 해피니스)’의 선박 신호가 뚝 끊겼습니다. 해피니스는 이란 하그르섬에서 이란산 원유 약 200만 배럴을 실은 뒤 아시아 지역으로 항해할 예정이었지요.

해피니스엔 무슨 일이 생긴 걸까요. 관련 당국의 조사 결과, 이 선박은 선박자동식별장치(AIS)라고 불리는 선박 위치 추적장치를 무단으로 끈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국제해상인명안전협약(SOLAS)에 따르면 선박은 이 장치를 24시간 켜놔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란 선박들이 위치 추적 장치를 함부로 끈 것은 불법 이죠.

국제 사회에선 이런 행위를 일삼으며 해상 레이더망에서 사라지는 불법 선박을 ‘유령 유조선’이라고 부른답니다.

그런데 최근 포착된 유령 유조선은 해피니스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200만 배럴을 싣던 또 다른 이란 유조선 ‘다이노 1호’ 역시 지난달 말레이시아·싱가포르를 거쳐 이달 중국 다롄항에 닿을 때까지 위치 추적 장치를 수 차례 끈 사실이 드러났다고 캐나다 CBC는 전했지요.

이와 관련해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 등은 “이란의 유령 유조선단이 석유 매수자를 찾아 바다를 떠돌고 있다”며 “(해피니스를 비롯해) 최소 유조선 7대의 위치 추적이 끊긴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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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총회 한 기자회견에 참석한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 [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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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엔 정상 운항하던 선박들이 최근 들어 ‘유령 유조선’이 돼 버린 까닭은 무엇일까요. 바로 미국의 대(對)이란 경제 제재 때문입니다.

앞서 지난 5월 이란 핵합의(JCPOC)를 탈퇴한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내달부터 이란의 에너지 부문과 관련한 제재를 가할 예정인데요. 결국 이란 선박들은 미국의 감시망을 피하려는 목적으로 ‘불법 영업’을 감행하는 것이란 분석입니다.

지난 2012년 오바마 행정부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의 경제 제재로 이란의 석유 수출이 하루 100만~150만 배럴로 제한되자, 이란 선박들은 위치 추적장치를 차단한 채로 원유를 밀수출했지요. 유동선 이동 추적기관인 클리퍼데이터의 상품 리서치 책임자 매트 스미스는 “수 년 전 이란이 경제 제재를 받을 때와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란 자국산 원유 3분의 2 수출…제재 시 경제 타격


이란산 원유를 비롯한 수출 산업은 이란 정부 수익의 상당수를 차지합니다. FT에 따르면 이란은 자국에서 생산된 원유의 3분의 2 가량을 수출하지요. 특히 이란 정부는 올해 초에는 하루 최대 380만 배럴까지 수출했다고 FT는 전했습니다.

오바마 행정부에 비해 더욱 강력한 트럼프 행정부의 제재는 이란 경제에 적지않은 타격을 입혔는데요. FT에 따르면 지난 5월 JCPOC를 탈퇴한 트럼프 대통령이 대(對)이란 경제 제재를 발표한 이래로 이란의 하루 평균 원유 수출량은 약 50만 배럴 가량 줄어 200만 배럴을 밑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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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소하는 이란의 원유 수출량. [FT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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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은 경제 제재는 이란의 자국 통화에도 큰 영향을 끼칩니다. FT는 “미국의 제재에 대한 공포심과 원유 수입 감소로 인해 이란 리얄화 가치는 최근 70% 가까이 떨어졌다”고 언급했지요. 설상가상으로 한국·프랑스 등 원유 수입국도 트럼프 행정부의 대이란 제재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중국과 인도 등 ‘큰 손’들도 이란 원유 수입량을 줄이기 시작했지요.

글로벌 에너지 컨설팅업체인 팩트글로벌에너지(FGE) 관계자는 “(미국의 경제 제재 여파로) 이란산 원유 1000만~1500만 배럴 가량이 고객을 잃은 채로 (이란) 해안가 선박에 보관돼 있다”며 “이란이 원유를 파는데 어려움울 겪고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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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당 유가 변동 추이. [FT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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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싼 이란산 원유의 수입을 중단하면 수입국들 역시 피해를 보지 않을까요.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산 원유의 ‘대체재’를 찾아주는 식으로 동맹국들의 잠재적 피해를 줄일 계획이라고 FT는 전합니다. 최근 백악관 고위 관료는 “트럼프 대통령이 사우디아라비아 측에 더 많은 원유를 생산해줄 것을 요청했다”며 “사우디 역시 이라크와 함께 원유 생산을 대폭 늘리고 있다”고 밝힌 바 있지요.

지난 21일엔 스티브 므누신 미국 재무장관이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이란산 원유 수입국들이 (경제) 제재를 면제 받으려면 이란산 원유 수입을 대폭 줄여야 할 것”이라며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이란 정부는 크게 반발합니다. 비잔 남다르 잔가네 이란 석유장관은 “(이란의 석유 수출 제한으로 인해) 부족해진 원유를 대신 공급하겠다고 나서는 나라는 이란에 적대 행위를 하는 국가”라며 “그들은 당당하게 ‘미국이 생산량을 늘리라’고 요구했다고 밝혀야 한다”고 엄포를 놨습니다.

“이란 정부, 공무원 월급 오일 달러 받아 지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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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의 한 유전. [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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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당장 이란의 원유 수출이 ‘끊어질 것’이라고 성급히 진단하진 않습니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의 제재가 이란 경제엔 지대한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란 정부가 공무원들의 월급과 유가 상승분에 대한 보조금을 페트로 달러(오일 달러)로 지급하기 때문입니다. 원유의 결제 수단인 오일 달러가 부족해지면 월급과 보조금을 마련하기 어렵게 되지요.

FT는 “이란 내에선 반(反)정부 시위가 이미 돌발적으로 발생하고 있다”며 “오일 달러가 바닥나면 대중의 인내심 역시 다할 것”이라고 분위기를 전했습니다.

에너지 리서치 컨설팅 기관인 영국 에너지 애스펙츠의 수석 원유 분석가 암리타 센은 “원유시장 내 변칙적인 행위를 포착해낼 수 감시망이 크게 강화될 것”이라며 “특히 대규모 밀반입은 적발하기가 매우 쉬워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FT 역시 “미국의 경제 제재에 직면한 이란의 유령 유조선은 (자국 경제에 대한) 치료제라고 볼 수 없다”며 “그저 자국이 직면한 문제의 증상”이라고 표현했지요.

조진형 기자 enis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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