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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5공 전사-6화]비판만 했을 뿐 독재 뿌리는 같아…5공은 ‘더 독해진 유신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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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전두환 정권이 기록한 <제5공화국 전사(前史)>는 앞선 박정희 유신체제를 ‘인권·노동 탄압’ ‘국민주권 통제’ 정권이라고 성토하고 있다. 하지만 이전 정권을 향한 이 같은 비판도 제5공화국이 ‘군부독재정권’이라는 본질을 바꾸진 못했다. 독재가 또 다른 독재로, 유신이 유사 유신으로, 군부가 신군부로 바뀌었을 뿐이다. ‘군부독재’라는 뿌리를 공유하는 두 정권은 당시를 살아낸 시민들에게도 유사한 기억을 남기고 있다. ‘겨울공화국’이라 불린 유신을 경험한 이들은 당시 공포를 지우기는커녕 아직도 때로 악몽을 꾼다고 했다. 5공화국을 살았던 이들에게도 같은 공포와 울분이 남았다. 더 교묘한 억압이 5공에서 자행됐다고 했다. 이들의 기억은 반문을 낳는다. 유신 긴급조치의 인권탄압과 삼청교육대의 그것은 다른가. YH 노동탄압과 청계피복노조 강제해산은 과연 다른가. 기자들이 불려다닌 ‘빙고호텔’(서빙고분실)과 ‘국제해양연구소’(남영동 대공분실의 위장명)는 무슨 차이가 있었나. 1970년대 유신철폐 운동과 1987년 6월항쟁의 구호는 모두 ‘민주주의 회복’이었다. 46년 전의 유신, 37년 전의 5공화국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시절을 살아온 이들은 하나같이 말한다. “여전히 더 나은 민주주의를 위해서….”


■ 인권탄압 - 긴급조치와 삼청교육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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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내까지 사복경찰 들어와…학생운동 위축

권형택 긴급조치사람들 역사정리위원장(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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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5월13일 긴급조치 9호가 제정된 후 5월22일 서울대 시위가 분기점이 됐던 거 같습니다. 그 전에도 데모하면 주동자들이 처벌받았지만, 교내까지 경찰병력이 들어오는 걸 생각하진 않았거든요. 그런데 그날은 마치 계엄령이 선포된 것처럼 삼엄한 분위기에, 전투경찰들이 저벅저벅 한 걸음씩 학교, 강의실로 밀고 올라오는 걸 보면서 ‘심상치 않다’고 느꼈어요. 멀뚱멀뚱 길가에서 구경하던 사람도 많이 끌려갔고, 갑작스레 몰려든 학생들로 강의동 입구는 막히고, 혼란 속에서도 뒤쪽 학생들을 잡아가던 소리가 들렸을 때의 공포감을 기억합니다. 그 위압에 대부분 학생이 질려버렸어요. 이후 학생운동이 급속도로 위축돼 작은 유인물 하나 만드는 것도 어려웠고, 학술행사 발언 한마디도 마음 놓고 할 수 없었습니다. 완전한 감시체제에 들어가 자취방을 전전하며 모임을 열어야 했고, 교내 잔디밭엔 사복경찰이 늘어서 있곤 했습니다. 지금은 당연하게 생각되는 자유가, 법이라는 이름으로 억압되던 때였습니다. 일절 비판을 허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처벌도 아주 강했어요. 배운 건 민주주의와 인권이었는데, 그 모든 것이 억압되는 상황이 너무 답답했던 시절이었습니다.”

■ 시 쓰다가 잡혀가…말 한마디로 매 맞아 죽어

삼청교육대 최장기수 이적 목사(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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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청교육대에서 임근실이라는 동료가 있었어요. 이 사람이 배고프고 춥고 매맞는 걸 못 이겨서 ‘교도소 10년 살면 살았지 여기선 하루도 못 살겠다’고 했다가 맞아죽었습니다. 지금도 그 한마디가 5공의 폭압 최전선에 있던 외침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그 말이 맞다고 일기장, 수양록에 썼다가 3년을 있었고요. 유신의 국토건설단과 5공 삼청교육대만 비교해봐도, 전 유신이 오히려 유순해 보일 만큼 5공이 최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삼청교육대는 깡패 잡는다고 포장됐지만 80%는 일반 시민이었고, 그 시민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했어요. 전과 하나 없이 시를 쓰다 잡혀간 제가 증거입니다. 그 시민들이 끌려가 휴전선 근처에 지하벙커 만들고 도로 닦고 통신선 깔고…. 탈출하거나 반항하는 사람들은 죽여버리고. 1년 내내, 한겨울에도 노역을 했습니다. 유신을 모체로 태동한 자들이 모체를 비판하는 것도 참 웃기는 일이지만, 유신보다 더 나쁜 짓을 했던 자들이 그런 기록을 남겼다는 걸 생각하면 화를 참기 어렵습니다. 박정희 18년 정권에도 엄청난 인권유린이 있었지만, 전두환은 그걸 5년 내 압축적으로, 오히려 더 많은 폭행과 학살을 저질렀습니다. 최악이라는 말도 아깝습니다.”

■ 노동탄압 - YH사건과 청계피복노조 강제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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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자는 기계 취급, 노동조합 만들기 어려워

최순영 경기교육청대표 시민감사관(65·전 YH노조 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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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의 노동’이오? 한마디로 ‘노동자는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고, 주면 주는 대로 받는 기계’ 이거였어요. 우리가 뭘 대단한 요구를 한 게 아니에요. 8시간 일하게 하고, 퇴직금도 지켜주고, 일요일은 쉬게 해주고…. 전태일 열사가 얘기했던 것처럼 ‘있는 법을 지키라’고 했던 것입니다. 원칙대로 하자는 것. 사람답게 살고 싶은 기본적인 욕심, 어느 시절이든 그런 욕구는 기본적인 거잖아요. 그게 하나도 안 지켜지는 데다 봉급까지 깎으려 드니 불씨에 기름을 부은 거였죠. 노동조합을 만드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어요. 사람 3명만 모여도 회사에서 쫓아와 훼방을 놔 모이려다 헤쳤다만 세 번 거치고 우여곡절 끝에 회사 눈을 피해 처음으로 50여명이 모였죠. 한 명 한 명이 겪었을 고민과 어려움을 헤치고 그 자리에 온 사람들의 얼굴을 마주할 때가 아직도 생각나요. 그렇게 힘들게 모인 동료들이었는데 YH사건 후에는 아무것도 못했어요. 담당형사가 기숙사에서 집으로 갈 때까지 따라다니는 거야. 동료들 중에는 ‘딸이 서울에서 일하다 고향 내려왔는데 경찰을 달고 왔다’면서 그게 엄청 큰일인 줄 알고 부모님이 억지로 시집을 보내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 ‘빨갱이’ 딱지 붙이고 사찰까지…직장 못 다녀

이승숙 전 청계피복노조 조합원(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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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에서 남성복을 만드는 재봉사였어요. 해산되기 직전 파업에 참여하고 조합활동을 시작했습니다. 5공화국 때의 노동권익이오? 전두환 정권은 노동권익을 대변하던 청계피복노조를 아무 이유 없이 해산했어요. 사람으로 치면 이유 없이 사형선고를 받은 거랑 똑같아요. 5·18을 기점으로 청계피복노조를 해산하고 이후엔 모든 민주노조를 탄압했습니다. 노동권익을 언급했다는 것 자체가 불쾌해요. 노조가 해산되자마자 여건은 급속도로 안 좋아졌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휴일 문제도 후퇴했고 8시간 근무, 퇴직금, 잔업수당도 그간 쌓아올린 성과들이 다 흐지부지됐어요. 노조가 없어지니까 사용자는 법을 지킬 이유가 없어진 거죠. 노조해산 철회를 요구하며 아시아·아메리카 자유노동기구(AAFLI·아프리) 사무실을 점거했을 때도 엄청 맞으면서 구속됐고 이후에도 ‘청계노조 애들은 빨갱이다’ ‘일시키면 골치만 아프다’는 말을 퍼뜨리고 다녀 일을 못하게 했습니다. 사찰도 심해 수시로 사업장에 경찰이 찾아오니, 사장이 계속 데리고 일을 할 수가 있나요. 얼마 못 가 잘리는 경우가 태반이었죠. 5공이 유신 노동을 운운한다고요?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그러세요.”

■ 정치참여 탄압 - 부마민주항쟁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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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 길다고 유행가 부른다고 잡아다 구금

최갑순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회장(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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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악몽을 꿉니다. 칼 달린 총을 든 군인들 사이를 걸어가는 꿈. 김영삼 의원 제명, YH무역 사건 등을 보면서 ‘갈 데까지 갔다’는 생각을 했어요. 23살이었죠. 경남대 국어교육학과에 다니고 있었는데 이전부터 시위를 준비하던 차에 부산에서 먼저 일이 터지고 갑자기 휴교하고…. 그래서 우리도 시위를 앞당기게 됐어요. 평범한 여대생 눈으로 볼 때도 인권탄압이었으니까요. 지금도 ‘유신’을 떠올리면 ‘잡혀간다’는 말부터 생각납니다. 머리가 길거나, 유행가를 잘못 부르거나, ‘이건 아닌데’ 말만 해도 잡아갔어요. 오죽하면 제가 지금도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안 잡혀가면 돼’입니다. 저도 50일 넘게 구금됐었어요. 마산 3·15의거탑에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모이는 사람들을 정리하는데 갑자기 뒤에서 머리채를 확 잡아끌었어요.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옆에 있던 친구에게 ‘가랑이를 찢어 죽일 것’이라면서 경찰이 바지를 찢었고, 저한테는 치마를 뒤집어 올려 눈앞이 보이지 않게 한 뒤 욕을 하면서 끌고 갔죠. 이후 5군데 이상을 돌아다니면서 조사·고문을 받는데, 옮길 때마다 군인들이 늘어선 ‘인간터널’을 지나가야 했고, 한 발짝 떼기 어려울 정도로 무서웠던 게 아직도 꿈에 나와요.”

■ 비무장 시민에 총 쏘는 등 잔인한 과잉진압

김후식 5·18민주화운동 부상자회 회장(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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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21일 공수부대 집단발포 때 왼팔에 총을 맞았습니다. 눈앞의 사람들이 픽픽 쓰러지는 것을 볼 때, 공포심이 사라지고 ‘어떻게 이럴 수 있나,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며 분노가 치밀어 올랐던 게 생생합니다. 목욕탕까지 쫓아가 사람을 패고, 옷을 벗겨 실어가고, 사람을 사람 취급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다른 시민들과 함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광주를 죽이려고 작정했던 겁니다. 애국가와 동시에 시작된 발포, 비무장 시민에 대한 과잉진압 등을 돌이켜보면 시민들을 일부러 자극해 폭동을 유도했던 거 같아요. 확실히 죽이려고. 국민을 주권자가 아니라 통치의 대상으로 봤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혼란이 오면 안된다’ ‘통치가 안정돼야 한다’는 명분으로 ‘한국적 민주주의’를 내세운 건 유신이나 5공이나 같았어요. 그렇게 잔인하게 목숨을 짓밟은 5공이 ‘정치의 정당성’을 얘기하는 건 기만입니다. 아직도 ‘발포 명령이 있었냐 없었냐’ ‘누가 책임자냐’ 등을 풀지 못하고 있는데 5공의 기만으로 숨겼을 진상을 명명백백히 드러낼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5공이 정치의 정당성을 얘기했다고요? 국민을 얼마나 우습게 봤는지 알겠습니다.”

■ 언론탄압 - 70년대 언론통제와 80년대 언론통폐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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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론인에 잇단 폭력, 비판 기사 한 줄도 못 내

김종철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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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권자인 국민의 눈과 귀를 멀게 하고 기본적인 저항권을 전면 부정하는 폭압정치, 비판적인 기사나 논평은 한 줄도 쓰지 말라는 게 유신의 언론관이었습니다. 1972년 10월 유신 선포 이후 동아일보 편집부에 근무할 때였는데 ‘국민투표에 대한 찬반토론 금지’라고 제목을 쓴 1면 편집자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발바닥을 몽둥이로 맞았습니다. 계엄사 발표에 있는 내용이었는데도 언론 전체에 공포공작을 하고 ‘까불지 마라’라는 신호를 준 거죠. 1973년 10월 서울대 학생들이 유신 선포 이후 최초로 유신정권을 비판하는, 당시로는 상상할 수 없는 집회를 열었는데 1단 기사로도 보도할 수 없었습니다. 젊은 기자들 50명이 밤샘 농성을 한 뒤 사회면 구석에 1단짜리 기사가 나갔고, 그 일로 편집국장이 중정에 끌려가 고초를 겼었죠. 이후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사건에서 연행된 사람들이 고문이나 불법 구금상태에서 재판을 받았다는 것을 폭로해도 1단도 보도할 수 없었습니다. 부단히도 싸웠습니다. 1974년 3월부터 노조 간부나 자유언론실천선언 주동자들을 강제로 해직시키고 폭력배 동원해서 내쫓고…. 오늘날까지 43년이 된 동아 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가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 언론사 앞에 장갑차… 해직 등 내부 분열 유도

고승우 80해직언론인협의회 공동대표(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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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H사건 때 추락사망한 김경숙씨 부모를 만났지만, 굉장한 공포 분위기 속에 그분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가셨어요. 그게 유신이었는데, 10·26과 12·12를 거치면서 분위기가 훨씬 엄혹해졌습니다. <5공 전사>에는 신군부가 마치 유신의 언론정책을 비판한 것 같지만, 당시 검열단이 ‘전두환이 유신의 적자’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녔던 걸 떠올리면 어이가 없죠. 편집부에 5·18 광주에서 사람 죽어나간다는 소문이 파다했을 때, 서울의 각 언론사 앞에는 장갑차가 한 대씩 와 있었습니다. 검열거부·제작거부를 중단하지 않으면 ‘쓸어버린다’는 얘기가 나왔고요. 광주는 피바다에, 회사 앞에는 탱크에, 전두환의 협박에…. 기자들의 비참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전두환이 언론사 사장들을 만난 다음날인가, 회사에 갔더니 ‘도피자금 줄 테니 빨리 숨어라’라고 한 적도 있었습니다. 1970년대 동아투위를 본 전두환은 언론탄압도 교묘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기자들이 한데 뭉치지 못하게, 해직이나 제재도 등급을 나눠 구심점을 남기지 않는 방식으로 내부의 분열과 반목을 유도했습니다. 박정희의 탄압이 우직하고 무식했다면 전두환은 교활하고 정교했습니다.”

■ ‘정치교체’ - 유신철폐 운동과 6월 민주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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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생들 너무 많이 잡아 재판 못 넘기고 구류

김성식 바른미래당 의원(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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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말기에는 너무 많은 학생들이 잡혀가 재판에 넘기지도 못하고 한 달짜리 구류를 살게 했습니다. 그때 일로 저도 학교에서 정학당하고, 야학·노동운동에 참여했었습니다. 유신 때는 데모를 해도 1984년도 이후 전대협 세대처럼 오랜 시간 집회를 하거나 조직적으로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서울대 앞 파출소가 ‘동양 최대 파출소’라고 할 만큼 숨을 쉬고 살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말도 안되는 독재가 반복되기도 했고, 데모에 참여하지 않는 학생들도 큰 틀에선 뜻을 함께하던 때예요. ‘유신철폐’ ‘민주주의 회복’ ‘독재타도’ 등 구호가 많았지만, 정치교체를 어떻게 이뤄야 하는가에 대한 전략적·정치적 구상은 없었습니다. 있었다면 1979년 말 당시에 잘 대처했겠죠. 10·26이 발생하고 3김이 복귀하고 신군부가 12·12 쿠데타를 일으키는 일련의 과정에서 사실,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물론 1979년 부마민주항쟁,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의 좌절 속에서 언젠가 터져나올 시민적 분노를 응축해오고 있었다고 봅니다. 그들의 헌신과 희생으로 민주주의를 이뤘다는 것을 기억해야 미래세대를 위해 정치적 공간을 열어야 할 우리의 숙제, 의무를 더 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 고문치사 자행하고 권력은 축재·비리 일삼아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의원(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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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총학생회장,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의장이었습니다. 가증스럽습니다. 그들은 애초부터 민주화의 ‘민’자도 염두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민주화를 토착화하려 노력한 것이 아니라 반공반북 이데올로기를 동원해 파쇼통치를 심화했고 탄압을 일상화했으며 그 반대편에 온갖 부정과 비리로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형성했을 뿐입니다. 평화적 정권교체 운운하기 전에 전두환 군사집단은 ‘군은 어떠한 경우에도 정치에 개입하지 않아야 한다’는 대원칙을 파괴했습니다. 80년 민주화의 봄은 군이 개입하지 않아도 민주화에 대한 높은 열망과 성숙한 의지로 얼마든지 평화적 이행이 가능했지만, 전두환은 12·12 쿠데타와 5·18 광주학살로 민주주의를 파괴하면서 그들의 본질인 군사파쇼를 적나라하게 드러냈습니다. 5공의 태생적 죄악은 광주학살입니다. 그것이 원죄가 돼 민주주의를 짓밟고 수많은 고문과 탄압을 일삼았으며, 지배권력 내에 각종 특혜와 축재, 불법과 비리를 독버섯처럼 배태했습니다. 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와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그 짐승 같은 뻔뻔함에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었습니다. 5공의 민주주의에 대한 진정성은 터무니없는 조작과 왜곡일 뿐입니다.”

조형국 기자 situati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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