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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월간중앙 고백 인터뷰] “영화에 또 도전할 것···필생의 꿈 K-테마파크 만들 테니 두고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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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영구→영화 감독·제작자→신지식인→법적 다툼→파산선고 ‘우여곡절’ 연속…

마당극 로 재기, “한국형 SF영화 로 세계 시장 석권한다”

중앙일보

심형래 감독이 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K-테마파크 동영상을 보여주고 있다. 심 감독은 ’반드시 영화로 다시 일어나겠다“고 다짐했다.


‘칠전팔기’ 심형래의 절망을 헤쳐 나가는 법


# 장면 1: 1985년 <소년中央>의 연말 ‘스타 인기 조사’코너. 분야를 불문하고 독자들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스타에게 한 표를 행사하는 방식으로 베스트 5를 선정했다. 1위는 3009표를 얻은 코미디언 심형래, 2위는 1329표의 가수 조용필, 3위는 1232표의 야구선수 최동원, 4위는 825표의 코미디언 김병조, 5위는 792표의 가수 전영록이었다.‘원조 오빠’ 조용필을 압도적 표차로 제친 심형래는 <소년中央>과의 인터뷰에서 “제가 뭘 한 게 있나요. 어린이 팬들에게 왜 그렇게 인기가 높은지, 글쎄… 잘 모르겠는데요”라며 겸연쩍어했다.

#장면 2: 영화 <용가리>로 한국 공상과학(SF)영화의 새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은 심형래가 1999년 신지식인 1호로 선정됐다. 당시 IMF 극복에 사활을 걸었던 정부는 각 분야에서 괄목할 성과를 거둔, 혹은 그런 가능성을 가진 사람을 신지식인으로 선발·인증했다. 신지식인 1호는 코미디언출신 영화 감독 겸 제작자 심형래, 2호는 의사 출신 과학자이자 기업인인 안철수다.

#장면 3: 2013년 3월 7일 서울중앙지법 파산1단독(판사 원용일)은 심형래에게 파산을 선고했다. 법원이 정한 파산관재인의 조사 결과 심형래에게는 더 이상 채권자들에게 나눠줄 재산이 없는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심형래가 <용가리>(1999년)에 이어 만든 <디워>(2007년)는 미국에 진출한 한국 영화중 최고 흥행을 기록했다. 그러나 200억원 이상 투자한 <라스트 갓파더>가 흥행 참패를 당하면서 심형래는 추락을 피하지 못했다. 제작사는 2011년 문을 닫아야 했고, 심형래 소유의재산은 대부분 경매 처분됐다.

그렇게 한동안 잊혀졌던 심형래가 돌아왔다. 지난 연말 ‘심형래 유랑극단’을 세우면서다. 당초 심형래는 2016년 여름, 중국에서 190억원을 투자받아 영화 <디워 2>를 제작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사드(THAAD) 배치’로 인해 한·중 관계가 냉각되는 바람에 계획이 틀어지고 말았다. 손 놓고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던 심형래가 새로운 돌파구 마련에 나선 것이 유랑극단 창단이다.

‘심형래 유랑극단’의 야심작 <뺑파게이트>에 대한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마당극의 대가(大家)라 할 최주봉·김진태·김성환·윤문식·안문숙 등과 심형래가 만들어낸 화음은 절묘했다. 올드팬들은 환호했고, 심형래 등 출연진에게는 사진 촬영 요구가 빗발쳤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동이었다.

월간중앙이 칠전팔기에 나선 심형래(60)와 만났다. 심형래는 “아직까지 나를 잊지 않고 반겨주시는 팬들을 보니 울컥했다”며 “조만간 영화 <디워 2>를 선보이게 될 것이다. 한국형 SF영화로 세계 시장을 석권하는 날을 기대해 달라. 아직 끝난 게 아니다”며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돌아온 ‘영구’, 함께 사진 찍자는 관객에 ‘울컥’




Q :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A : “마당극 <뺑파게이트>가 얼마 전(10월 5일)에 끝났습니다. 11월 3~4일 서울 양재동 더케이 아트홀에서 ‘심형래쇼’를 시작합니다. <뺑파게이트>의 관객이 주로 고령층이었는데, 그분들은 과거에 제가 했던 슬랩스틱 코미디를 좋아하시더라고요. 극이 끝나고 난 뒤 60~70대 어르신들이 저와 함께 사진을 찍기 위해 줄을 서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요즘 노년층이 볼 만한 공연이 별로 없다는 점도 (심형래쇼를 시작하는) 계기가 됐죠. 형식은 과거TV에서 봤던 <유머 일번지>나 <쇼쇼쇼>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무용·코미디·악극이 어우러지는 종합 버라이어티쇼라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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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형래 감독의 2007년 8월 개봉작 시사회가 코엑스 메가박스에서 열렸다. 시사회 후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심 감독.




Q : 마당극은 처음이셨죠?

A : “그렇습니다. 공연 끝나고 (인터넷 커뮤니티 등의) 댓글을 봤는데, 자식들이 부모님들에게 표를 사서 주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더라고요. 부모님들은 관람 후 주변에 자랑하면서 이런 쇼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이야기를 하고요. 라이브쇼는 배우와 관객이 직접 교감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무대라고 생각됩니다.”




Q : 지난해 극단을 만들었고, 올해는 <뺑파게이트>에 직접 출연도 하셨습니다. 무대에 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A : “힘든 시기를 겪고 나서 한동안 노출을 자제했습니다. 사실(출연) 제의는 정말 많았었죠. 그러던 중 지난 5월에 ‘마당극을 함께 해보자’는 제안이 왔어요. 사실 마당극·연극·뮤지컬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아서 걱정을 많이 했어요. 더구나 출연진이 하나같이 각 분야의 대가들시잖아요? 탤런트는 정확성을 추구하지만 개그맨은 애드리브가 중요하기 때문에 걱정이 더 많았습니다.”


<뺑파게이트>는 마당놀이 특유의 해학과 풍자 정신을 잘 살려낸 작품으로 평가된다. 공공기관 채용비리와 문화·예술계 성폭력 등 부조리에 대한 비판도 담겨 있다. 심봉사 아들 심창 역은 마당놀이의 대가 윤문식이 맡았다. 심형래와 탤런트 김성환이 황봉사 황칠 역을, 탤런트 최주봉·김진태가 심봉사 역을 맡았다. 뺑파 역에는 방송인 안문숙과 개그우먼 정은숙이 캐스팅됐다. 심형래는 심청이 죽고 나서 보상금을 빼앗으려는 뺑덕어멈의 내연남 역할로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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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형래 감독의 어린이용 SF영화 <용가리> 제작 현장. 심 감독이 제작진과 함께 컴퓨터 그래픽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면 좋은 모습으로 찾아뵐 수 있을 것 같습니다.아직 시련이 끝난 것도 아니고, 제가 할 일이끝난 것도 아니니까요.”


한때 정직원 280명 영화제작사로 키웠지만…




Q : 오랜만에 관객과 만나셨죠?

A : “고마울 뿐이었죠. 무대에 올라설 때 관객들이 박수를 쳐주니까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저는 제 스스로에 대해 사회에 피해를 많이 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의 컴백을 진심으로 응원해 주는 관객들을 보고 느낀 점이 많았습니다. ‘아 나는 나 혼자만의 몸이 아니구나.’ 그리고 어르신들은 요즘 젊은 개그맨들의 개그를 어렵게 느끼는 경우가 많다는 걸알게 됐습니다. 아무래도 젊은 친구들이 신조어를 많이 쓰니까 이해가 어려운 거죠. 또 과거 슬랩스틱 코미디에 대한 요구와 향수가 크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사회에 웃음을 줬고, 또 우리 영화를 해외에 수출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할리우드 영화만 국내에 들어와서 수입을 올리는 구조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본업인 코미디를 소홀히 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코미디에다시 집중하고 싶어졌어요.”




Q : 데뷔 때를 기억하시나요?

A : “1982년에 데뷔했습니다. 그때가 아마 TBC와 KBS가 통합하는 시기였을 겁니다. 당시에는 고(故) 이주일 선배가 최고였는데, 내가 데뷔 후 7개월 만에 이주일 선배를 제치고 (코미디언 인기 순위에서) 1등을 했었죠.”




Q : 잘나가는 코미디언에서 영화 감독 겸 제작자, 그리고 신지식인 또소송에 이은 파산선고 등 굴곡이 많았습니다. 그 과정에 어떤 스토리가 있나요?

A : “제 목표는 단 하나였습니다. 우리나라에 괜찮은 테마파크 하나를 만드는 것이었죠. 일본에는 지브리 스튜디오(애니메이션 전문 스튜디오)나 도쿄 디즈니랜드처럼 볼거리가 많아요. 아키하바라에 가면 프라모델이나 전자제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요. 미국에도 드라마 속 캐릭터가 나오는 테마파크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놀이공원에는 청룡열차나 바이킹만 있어요. 외국에서는 스토리를 가지고 테마파크를 만들어 관광수익을 내고 있는데…. 참 아쉬웠습니다.”




Q : 그래서 영화로 뛰어드신 건가요?

A : “저는 과거에 제가 만들었던 영화 속 캐릭터를 응용하고 싶었습니다. ‘용가리’나 ‘디워’ 같은 SF 캐릭터는 지구상에 없는 것들이잖아요? 많은 자금을 투입해서라도 미술·CG(컴퓨터그래픽)·미니어처를 만들 인프라를 제대로 키워보고 싶었습니다. (그 영화들을 만들) 당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을 찾아가서 ‘이 분야를 키워볼 테니 200억원만 투자해 달라’고 요청한 적도 있어요. 그런데 저는 개인이라 직접 투자를 받을 수 없었고, (그 돈은) 영화진흥공사와 애니메이션공사에 돌아갔습니다. 결국 사재를 털어 독일에서 인재 영입하고 직원들 유학도 보냈습니다. 그런데 개인이 하는 데 한계가 있잖아요? (꾸준한) 매출은 없는 상황에서 직원들에게 숙식 제공하고 기술도 가르치다 보니까 버티기 힘들었습니다.”




Q : 결정적으로 심형래 감독을 힘들게 했던 사업은 무엇인가요?

A : “고정 매출이 없다는 점이 치명적이었요. 다른 영화사들은 프로젝트에 따라 직원들을 (계약직으로) 채용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스태프들까지 전부 정식직원으로 뽑았어요. 한창때는 직원만 280여 명이었죠. 그런데 나중에는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디워>를 발표했을 때만 해도 임금체불은 없었는데 <라스트 갓 파더>의 실적이 저조하면서 3개월 정도 (임금이) 밀렸어요. 결국 회사가 경매에 넘어가면서 임금은 다 지급했고, 퇴직금만 일부 미지급 상태입니다.”




Q : 일부 언론에서 ‘심형래 강원랜드 도박설’ 보도가 나왔지만, 결국검찰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았습니다.

A : “나중에는 은행 돈이 막혔습니다. 돈을 구하려면 강원랜드에 가야 했어요. 거기에 큰돈을 움직이는 지인들이 많았으니까요. (지인들) 옆에서 같이 놀아주고 비위를 맞춰야만 돈을 빌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회삿돈 횡령이요? 횡령하고 싶어도 횡령할 돈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시련도, 할 일도 끝난 게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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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TV 개그 프로그램인 <유머 일번지>의 한 장면. 이 프로그램의 ‘영구야 영구야’ 코너에서 심형래·윤혜영 커플은 찰떡궁합을 과시했다.




Q : 심형래는 점차 ‘잊혀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최근 마당극으로 재기의 신호탄을 쐈는데 감회가 어떠세요?

A : “저로 인해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요. 저는 사회에 많은 빚을 진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번에 꼭 재기해서 성원에 보답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팬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또 다른 새로운 것들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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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연말 <소년中央> 선정 인기스타 베스트 5. 코미디언 심형래가 ‘원조 오빠’ 조용필을 압도적으로 제치고 1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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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코미디언, 영화 감독·제작자, 마당극 배우 등 다양한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어떤 길이 가장 ‘맞는 옷’ 이라고 생각하시나요?

A : “(정확히) 맞는 길은 없는 것 같아요. 다만 ‘나’라는 인물이 어떤 면에서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은 자주 받습니다. 과거 한 라디오 방송에서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의 사연을 보고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힘든 상황일수록 자신이 가진 재능에 집중하라. 사람은 김치를 잘 담그거나 장기를 잘 두거나 뭐든 잘하는 게 있다. 잘하는 것을 하면 된다.’ 요즘 경제가 어렵습니다. 그러다 보니 타인을 배려할 여유가 많이 없어진 것 같아요. 이럴 때일수록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Q : 옆에서 도와 주신 분들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A : “아직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면 좋은 모습으로 찾아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직 시련이 끝난것도 아니고, 또 제가 할 일이 끝난 것도 아니니까요.”




Q :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시나요?

A : “온·오프라인을 함께하는 테마파크를 계획하고 있습니다.과거에 만들었던 공룡 같은 것들을 실물로 구현하는 것이죠. 예전에 코엑스 전체를 빌려서 <파워킹>이나 <우뢰매> 같은 영화에 쓰인 소품들을 전시한 적이 있습니다. 플라잉 제트나 공룡들을 전시하니까 사람들이 많이 몰렸어요. 당시 개그맨 후배가 그 앞에서 아이스크림을 팔았는데, 2000원짜리를 하루에 480만원어치 팔았을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콘텐트를 활용해서 온·오프라인을 융합할 필요가 있어요. 예를들어 <용가리> 5D 영화를 보고 있으면, 그 용가리가 (스크린에서) 튀어나와서 좌석을 막 흔드는 겁니다. 동시에 위에서 용가리의 손이 내려오기도 하고, 용가리가 눈앞에서 싸우기도 합니다. 또는 <디워>에서 이무기가 건물을 뚫고 들어가는 장면의 다음 컷에 이무기가 관객들 앞으로 튀어나오는 장면을 넣는 겁니다. 이렇게 영화 감상과 직접 체험의 동시 작용을 추구하는 것은 세계에서 처음일 겁니다. 뿐만 아니라 영화 속 상황을 오프라인 상점과 연계해서 경험하도록 하는것들도 하나의 묘안이 될 수 있습니다. 다시 영화로 일어서고 싶습니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 있다’는 말 기억하라”




Q : 테마파크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해 주시죠.

A : “우리나라에는 스튜디오·조명·CG·사운드가 한군데 모여서 이뤄지는 인프라가 없는 실정입니다. 설령 있다 해도 장소 이동이 너무 빈번해요. 그래서 양질의 영화를 만들기 어려운 구조입니다. 스튜디오·CG 이런 것들을 죄다 한군데로 모으겠다는 거죠.”




Q : K-테마파크를 만드시는 것이 최종 목표인가요?

A : “(K-테마파크는) 콘셉트도 좋지만 인재를 육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합니다. 미니어처나 음향이나 부가가치를 높이려면 실무적 인재를 키워야 합니다. 지금 미디어 관련 학과는 대부분 감독이나 배우 육성에 치우쳐 있어요. 그래서 저는 분야별로 재능 있는 젊은이들을 가르치고 싶습니다. SF영화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산업을 키워낼 수 있는 요람을 만드는 것이죠. 일반 대학에서 공부를 해도 다시 충무로에 가서 공부해야 하는 구조를 극복하고, 4년 공부하면 바로 실전에 나갈 수 있는 인력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테마파크의 경제적 효과도 상당할 거예요. 테마파크 내 가게에는 스토리텔링이 들어가는데 여기서 아르바이트 인원만 고용해도 상점당 3명씩,1000명 이상 고용 창출이 됩니다. 그리고 이걸(K-테마파크) 전 세계로 수출하면 더 큰 가치를 창출할 수 있고요.”




Q :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으신지요?

A : “사람들이 힘들면 자살하려는 경우가 있죠? 저라고 왜 그런유혹이 없었을까요? 한때 저는 국내 연예인 가운데 가장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었어요. 세금도 가장 많이 냈고요. 그런 제가 검찰에 소환되고, 재판받고, 압수수색 당하고, 파산하고…. 쓰나미처럼 몰려오는데 감당하기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기본으로 돌아갔어요. 택시 운전을 하든, 노점상을 하든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장점이 있다는 걸 믿었어요.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는 말을 기억한다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을 거예요.”




Q :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면?

A :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본인이고, 그 다음은 본인의 생각을 따르는 것입니다. 성공과 실패의 구분은 사고의 방향이긍정적인지 패배적인지, 그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려움이닥쳐도 긍정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글 최경호 월간중앙 기자

사진 전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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