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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나쁜 남자’ 양녕대군을 통해본 연애의 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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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투데이 권경률 칼럼니스트] [권경률의 사극 속 역사인물 94 – 양녕대군 : 세자 자리 잃은 스캔들 메이커]

머니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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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는 알고 보면 두 사람만의 소소한 개인사가 아니다. 연애만큼 사람들의 입방아에 자주 오르내리는 일이 없다. 누가 누구를 만나고 어떻게 사랑을 나누는지, 세상은 집요하게 캔다. 역사에서도 연애는 사회적인 관심사였다. 어떤 연애는 시대를 바꾸기도 한다. 조선시대 양녕대군과 어리의 연애사건도 그 가운데 하나다.

사극에서 양녕대군은 아버지와의 불화로 세자 자리에서 쫓겨나는 비운의 왕자로 그려진다. 당사자에게는 불행이었지만 덕분에 동생 세종대왕이 즉위했으니 나름 한국사에 큰 공헌을 한 셈이다. 그런데 세자 교체에는 양녕의 ‘부적절한 연애’도 한 몫 단단히 했다. 도대체 이 남자, 연애를 어떻게 했기에 왕위까지 놓쳤을까.

1. 임자 있는 사람한테 함부로 들이대기

양녕대군은 조선 3대 임금인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의 장남이었다. ‘유교국가’ 조선에서 왕위는 적장자(嫡長子), 즉 왕비의 맏아들이 물려받는 것이 원칙. 양녕은 1404년 11살의 나이에 세자가 되면서 다음 임금으로 낙점 받았다.

이제 후계자 수업만 얌전히 받으면 세자 양녕이 보위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부모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자식농사다. 부모가 임금과 왕비라도 별 수 없다. 세자는 사춘기에 접어들며 삐뚤어지더니 희대의 스캔들을 일으키고 낙마한다.

‘태종실록’ 1417년 2월 15일 기사에 처음 등장한 이 스캔들은 조선을 뒤흔들었다. 세자가 원로대신 곽선의 첩 어리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첩은 정식 혼인을 하지는 않았지만 통념상 한 집안에 속한다. 임자 있는 여자라는 말이다.

왕실의 체통은 땅에 떨어졌다. 자존심 센 태종 이방원은 신하들 보기가 부끄러웠을 터였다. 양반사대부들은 마치 자기 애첩이라도 빼앗긴 양 분노했을 테고. 저자거리의 백성들은 술자리 안주로 삼으며 지배층을 한껏 조롱했으려나.

2. 힘으로 밀어붙이며 만남을 강요하기

어리의 용모가 빼어나고 재주도 뛰어나다는 걸 세자에게 귀띔한 이는 악공 이오방이었다. 학창시절 사귄 벗이 평생 간다는데 양녕은 후계자 수업은 등한시하고 틈만 나면 궁궐을 드나드는 화류계 인사들과 어울렸다. 한량 패거리 두목 구종수, 악공 이오방 등이 세자에게 아부하며 연회를 마련하고 환락의 세계로 안내했다.

양녕은 사람을 시켜 한번 만나자는 전갈을 넣었다. 어리는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세자가 왜 나를? 그녀는 이미 원로대신의 첩이었다. 대갓집 소실(小室)로 편안하게 살고 있었다. 왕세자와 그렇고 그런 만남이라니, 부담스럽고 적절하지도 않다. 어리가 난색을 표했지만 양녕은 집요했다. 환심을 사려고 수놓은 비단 주머니까지 선물로 보냈다.

어리는 곽선의 양자인 판관 이승에게 찾아가 이 사실을 알리고 신변보호를 요청했다. 그러나 세자는 막무가내였다. 젊은 환관들을 거느리고 그 집에 단체로 쳐들어간 것이다. 결국 이승은 어리를 내놓았다. 일국의 왕세자가 나타나 눈알을 부라리는데 어쩌겠나.

양녕은 그녀를 데리고 의기양양하게 세자궁으로 돌아갔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 일을 ‘납치(納置)’라고 적었다. 요즘으로 치면 ‘철컹철컹’ 쇠고랑 찰 사건이다.

3. ‘몰래연애’ 한다면서 내부의 적 만들기

아무튼 세자는 어리를 감춰놓고 ‘몰래연애’를 즐겼다. 세자궁은 임금이나 왕비의 거처와 멀리 떨어져 있었고, 내관과 궁녀들도 양녕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이라 비밀이 새나갈 가능성이 적었다. 관부에 신고하려던 곽선의 양자도 협박으로 입단속을 시켰다.

문제는 처가였다. 사실 세자 양녕은 유부남이었다. 그는 14살 때 김한로의 딸과 부부의 연을 맺었다. 김한로는 미래 임금의 장인이자 측근으로서 세자를 보호할 책임이 있었다. 하지만 세자궁의 은밀한 비밀은 이 집안으로 흘러들어가서 화근이 되었다.

파국의 시작은 궁중에서 일어난 작은 해프닝이었다. 별감 소근동이 무수리와 연애하다가 적발되었는데 아 글쎄 이 자가 심문받다가 엉뚱하게 세자의 비행을 털어놓은 것이다. 소근동은 원래 세자의 장인 김한로의 종이었는데, 무수리와의 연애를 고발한 사람이 바로 김한로였다. 이 고변은 전직 종이 옛 주인에게 앙심을 품고 엿 먹인 것이다.

소근동의 폭로로 드디어 세자의 납치극과 몰래연애가 드러났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말초적인 소식이 대박뉴스다. 이 스캔들은 빛의 속도로 방방곡곡 퍼져나갔다.

4. 자칭 연애도우미들에게 휘둘려 방종하기

태종 이방원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구종수, 이오방 등 세자와 어리의 스캔들에 관련된 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이라는 어명이 떨어졌다.

구종수는 장안의 한량 패거리 구오방의 우두머리로 과감히 세자에게 접근했다. 종묘와 궁궐 사이의 담장에 대나무 다리를 놓고 양녕의 거처를 드나든 것이다. 때로는 세자를 궁 밖으로 불러내기도 했다. 양녕은 구종수의 집에서 연회를 열고 유흥을 즐겼다. 악공 이오방 등이 피리를 불고 가야금을 탔으며, 유명 기생들이 흥을 돋우었다.

구종수의 형 구종지와 구종유도 함께 했다. 형제들은 세자에게 뇌물을 바치며 충성을 맹세했다. 그 뇌물 중 일부는 놀랍게도 태종 이방원의 측근이었으나 권력을 휘두르다가 유배를 떠난 이숙번에게서 나왔다. 세자와 어리의 스캔들은 이 난잡한 커넥션의 일환이었을 뿐이다. 의금부 도사에게 사건 내막을 보고받은 태종은 불호령을 내렸다.

세자의 연애 및 유흥 도우미였던 구종수 형제와 이오방은 참수해서 저자에 목을 매달았다. 한량 패거리와 세자궁 내관들도 곤장을 치고 유배를 보냈다. 국기를 문란하게 만드는 일이므로 엄중한 예방조치를 취한 것이다. 달리 보면 (부모들의 뻔한 레퍼토리겠지만) 아들을 타락의 길로 인도한 나쁜 친구들에게 책임을 물은 꼴이기도 했다.

정작 이 못된 연애의 당사자인 양녕은 별일 없었다. 처가로 쫓겨났다가 며칠 후 구구절절한 반성문을 쓰고 궁으로 돌아온 것이다. 심지어 그 반성문조차 세자의 스승 변계량이 대필했다고 한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더니 그야말로 솜방망이 처분이었다.

5. 이미 떠난 사랑에 연연해 매달리기

자 그럼 세자 양녕은 어쩌다가 부왕 태종에게 내쳐졌을까? 모든 것은 세자의 상사병에서 비롯되었다. 어리가 궁에서 쫓겨나자 양녕은 침식을 거른 채 앓아누웠다. 보다 못해 장인 김한로가 나섰다. 그는 태종이 아닌 세자의 신하였다. 가문의 미래가 다음 임금이 될 사위에게 달렸기 때문이다.

‘귀한 사위 얼굴이 반쪽인데 내가 가만있을 수 없지.’

김한로는 어리를 자기 딸, 곧 세자빈의 여종으로 꾸며 몰래 궁에 들였다. 세자와 어리의 연애는 다시 불붙었다. 처음에는 납치였지만 이즈음에는 서로를 절실히 사랑했던 것 같다. 그 결실로 아이까지 생겼으니…. 이 사실은 비밀에 부쳐졌다. 하지만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 게 궁궐이다.

6. 가족을 외면하고 자기 연애만 열중하기

어리와 아이의 존재가 들통 난 것은 1418년 3월의 일이었다. 어느 날 세자의 누이들이 궁궐에 들어와 어머니 원경왕후를 보는데 마침 태종도 함께 했다. 이 자리에서 경정공주가 눈치 없는 얘기를 꺼냈다. 세자궁에서 유모를 구하여 어쩔 수 없이 보냈다는 것. 그 아이가 누구냐고 물으니 공주는 사실대로 고했다.

태종이 더욱 열 받은 것은 그 무렵 넷째 왕자 성녕대군의 병이 깊어져 오늘내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왕 부부는 1405년 늦둥이로 태어난 성녕을 무척 예뻐했다. 그 막내 왕자가 14살의 나이로 죽게 생겼으니 왕실의 슬픔이 얼마나 컸겠는가. 그런데 세자라는 놈이 몰래 아이까지 낳고 시름에 잠긴 부모를 속여?

얼마 후 성녕대군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버지의 상실감은 맏이에 대한 서슬 퍼런 분노로 이어졌다.

7. 부모가 반대한다고 감정적으로 대응하기

태종 이방원은 세자의 장인 김한로를 유배 보내고 세자빈도 사가로 쫓아냈다. 양녕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부왕에게 원망을 가득 담아 편지를 보낸 것이다. ‘태종실록’ 1418년 5월 30일 기사에 나오는 편지를 요약해보면 대충 이런 내용이다.

“아버지 여자는 다 궁중에 들이는데 저는 왜 안 됩니까? 어리를 금하면 잃는 것만 많고 얻는 것은 적을지도 모릅니다. 잘 생각해보고 처분하십시오.’

어찌 보면 간청이었고, 어찌 보면 협박이었다. 기왕에 들킨 거 양녕은 어리와의 관계를 인정받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방원이 누구인가. 27명의 조선왕 가운데 가장 냉혹한 인물 아닌가. 장남이 정면도전 하자 그는 미뤄오던 결단을 내렸다.

1418년 6월 3일 태종은 세자를 폐하고 셋째 왕자를 그 자리에 앉혔다. 출중한 학문으로 인정받고 있던 충녕대군이었다. 8월 8일에는 문물과 제도로 나라를 다스릴 적임자라면서 임금 자리까지 물려줬다. 그이가 바로 세종대왕 이도(李祹)다.

8. 연인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원망하기

양녕대군은 세자 자리에서 쫓겨나면서 유배를 떠나야 했다. 새 임금 세종은 형님을 깍듯하게 예우하고 귀양살이의 편의를 봐주었다. 물론 그런다고 고마워할 양녕은 아니었다. 그는 사냥이다 뭐다 마음대로 쏘다니더니 1419년 초에 돌연 유배지에서 사라져버렸다.

폐세자의 돌발행동에 궁궐이 발칵 뒤집혔고 그 화살은 애꿎은 여인에게 날아갔다. 장인 김한로의 첩과 폐세자빈의 유모
머니투데이

권경률 역사칼럼니스트


가 어리를 찾아가 원망하고 구타한 것이다. ‘나쁜 남자’를 사랑한 죄밖에 없었던 어리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다가 스스로 목을 맸다. 나중에 제 발로 돌아온 양녕대군은 이 소식을 듣고 말없이 비파를 켰다고 한다.

조선 건국 초기에 떠들썩한 연애스캔들을 일으킨 양녕대군과 어리! 이 사건은 양녕에겐 임금 자리와 맞바꾼 ‘상사병’이, 어리에겐 여자라서 서러운 ‘불상사’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세종대왕을 역사무대로 불러냈으니 후손들에게는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해야 할까?

권경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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