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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터치! 코리아] '정치 꼰대' 안 되려면 '셀프 디스'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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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생각 다르면 다 틀리다' 우기는 정치인들이 북핵 협상

안보 걱정하면 反통일 세력인가… 자기 낮추고 쓴소리 경청해야

조선일보

김윤덕 문화부장


'막걸리 설전'으로 악성 댓글에 시달린 음식 평론가 황교익씨는 억울했을 것이다. '신(神)의 입'이라도 술 맛의 미세한 차이를 분별하기 힘든데 초보 식당 주인에게 상표를 가린 뒤 막걸리 맛을 맞히게 한 백종원씨의 예능이 황당해 한마디 했을 뿐이다. 덩달아 딸려나온 과거 발언들은 또 무슨 죄인가. "불고기의 원조가 일본"이든, "떡볶이는 맛없는 음식"이든 맛 품평이 업(業)인 사람이 펼칠 수 있는 주장 아닌가.

문제는 '태도'였다. 테스트의 목적이 청년 상인에게 막걸리의 세계가 얼마나 다양하고 심오한지 일깨우려는 '설정'이었음을 늦게라도 인정했다면, "중졸 수준의 네티즌" "기레기들" 운운하며 분개하는 대신 조곤조곤 대중의 오해를 풀어줬다면, "나와 다른 생각은 전부 틀리다고 우기는 꼰대" 소리는 듣지 않았을 것이다.

그 비슷한 풍경을 얼마 전 TV 토론에서도 봤다. KBS '엄경철의 심야토론'이 '왜 종전선언인가?'란 주제로 여야 의원들을 불러 모은 자리다. 종전선언이 북의 비핵화와 평화협정으로 가는 견인차가 될 거란 주장과 대한민국의 안보만 위협하는 북의 꼼수란 견해가 팽팽히 맞섰다. 문제는 여당 대표로 나온 남성 의원의 '태도'였다. 야당 측 여성 의원이 종전선언보다 비핵화 실현이 우선이라며 평양회담의 한계를 비판하자, 남성 의원은 수차례 끼어들며 "엉뚱한 소리" "좀 더 전문적으로 말하라"며 면박을 줬다. "말을 자르지 말아 달라"는 요청에도 "안 들어봐도 뭔 얘기 할지 다 안다"며 혀를 찼다. 그가 북핵 6자회담 수석대표까지 지낸 '외교관' 출신이라 놀라웠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위해 처세의 달인들이 내리는 처방이 '셀프 디스', 자기 낮춤이다. 남을 웃길 때 자신을 제물로 삼으면 십중팔구 성공하고, 새치기로 대화의 질서를 깨선 안 되며, 말을 독점해 적(敵)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이를 어기면 자기주장이 아무리 훌륭해도 상대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백종원씨는 영리하다. 황교익씨가 그의 음식은 설탕 범벅이라고 질타했을 때, 백씨는 "당연한 지적이다. 내 음식이 세발자전거라면 셰프들은 사이클 선수"라고 몸을 낮췄다. 토론 패널로 신망을 얻은 정치학자 홍성걸의 화법도 비슷하다. 그는 상대가 자신의 의견을 거칠게 반박해도 "정말 중요한 지적" "깊이 공감한다"며 한발 물러난 뒤 재반박을 이어간다. 북한 김정은 위원장이 살인마 대신 '쿨'한 신세대 이미지를 얻은 것도 따지고 보면 셀프 디스 덕이다. "우리 교통이 불비해서" "발전된 나라들에 비하면 우리는 초라해" 같은 발언이 그를 예의 바른 지도자급으로 격상시켰다.

요즘 들어 셀프 디스 처세가 절실해 보이는 건 청와대다. 대변인이란 사람이 툭하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다. 청와대와 국민의 소통 창구인 대변인은 대통령의 입이자 얼굴인데, 언론이 조금만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도 인상을 구기며 꾸짖으니 민망하다. 청와대가 이러니 통일부 장관도 대놓고 언론 자유를 침해하는 걸까.

"파시즘이 가족 사업인 나라의 허황한 약속에 속지 말라"는 올브라이트 전 미 국무장관의 말보다 "종전선언이 비핵화의 지름길이요, 한·미 공조는 최상"이라는 우리 정부의 말을 믿고 싶다. 그러려면 안보를 걱정하는 국민과 언론을 '반통일 세력'이라 윽박지르지 말고 쟁점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설득부터 해달라.

교황이 평양 땅에 엎드려 입을 맞춘다고 해서 북한이 당장 핵을 포기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셀프 디스에 '밀당'에도 능해서 상대가 바짓가랑이 붙잡고 읍소하게 만드는 북의 외교술을 볼 때마다 가슴이 섬뜩해진다.

[김윤덕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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