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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Why] 한밤중 친한 선배가 부탁한 사적인 진료… 갑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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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호의 뼛속까지 정형외과]

조선일보

동료가 정형외과 전공의 때 있었던 일이다. 친하게 지내던 마취과 선배에게서 밤늦게 전화가 왔다. 세 살짜리 아들이 갑자기 아프다고 보채면서 팔을 잘 움직이지를 않는데 어쩌면 좋으냐고 걱정스레 물었다. 선배 집에서 가까운 곳에 살고 있던 동료가 추리닝 바람으로 방문했다. 엑스레이 사진은 찍어서 확인할 수 없었지만, 정형외과적 진찰을 해 보니 골절이나 탈구 등 큰 이상은 없는 것으로 보였다. 기본적인 처치 후, 집에 있던 보자기로 얼추 팔걸이 비슷한 것을 만들어 주었더니 애가 새근새근 잠들었다. 다음 날에도 별문제 없이 잘 놀고, 혹시나 해서 정형외과 외래에서 찍어본 사진도 이상이 없었다. 그 후에 마취과 선생님이 수술 스케줄 등에서 소소하게 동료의 편의를 봐 줬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여기까지 보면 훈훈한 해피엔딩 스토리 같지만, 그게 또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나중에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동료의 과 선배는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마취과 의사의 정형외과 의사에 대한 갑질'로 생각해서 '너는 그런 일을 당하고도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느냐?'라고 했단다. 애가 아프면 병원 응급실로 가 보아야지, 오밤중에 자기 집으로 후배를 불러서 개인적인 일을 시키는 게 제정신이냐고. 분개하는 과 선배에게 그런 게 아니라고 설명하느라 진땀을 뺐다고 한다. 자신과 전혀 다르게 상황을 이해한 선배에게 당황스러웠다고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정형외과 선배는 마취과 선배와 티격태격한 과거가 있다고 한다.

이것은 훈훈한 미담인가, 졸렬한 갑질인가. 보는 사람이 어떤 식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완전히 다르게 보일 수도 있겠다. 혹시라도 나중에 동료와 마취과 선배의 관계가 틀어지면 어떻게 될까? 각자 '그 사람이 옛날에 나한테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시켰어'라든가, '그 아이가 옛날에는 밤에 불러도 잘 오더니, 이제 말 안 듣네. 많이 컸구나'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아직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나는 좋은 뜻으로, 자발적으로 한 일이었다. 그런데 옆에서 보는 사람이 '자존심도 없느냐', '그렇게까지 해서 먹고살아야 하느냐'라고 오해한다면, 갑자기 '내가 바보인가'라는 참담한 생각이 든다. 반대로 상대방의 호의와 배려로 생각하고 받았다가 나중에 후회하는 경우도 있다. 내게는 미담인데 누군가에게 갑질이거나, 또는 그 반대의 경우는 없었을까. 미담과 갑질 사이 경계선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면서 트집 잡힐 일은 없었을까.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감독의 영화 '라쇼몽(羅生門)'은 같은 일을 겪은 후에도 사람에 따라 보는 시각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상대방이 늘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오판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특히 자신의 이해관계나 신념에 따라서 그 차이는 얼마든지 더 커질 수 있다.

'갑질'이 요즘 화두 중 하나다. 그렇더라도, 꼬투리 하나도 잡히지 않으려는 소심한 마음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적극적인 선의를 덮어버리는 일은 없기를 희망해 본다. 갑질 걱정으로 미담마저 없어진다면, 이야말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 것이 아니겠는가.



[유재호 정형외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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