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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 (목)

195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빽판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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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빽판’의 시대, ‘빽판’의 추억 中

옥두옥이 미국 현지서 녹음한 노래들

58년 유니버설사, 유성기 해적판 발매

최동욱·이종환 등 팝송 디제이

프로그램 이름 딴 ‘빽판’도 제작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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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해외 음악을 담은 불법 음반의 역사

국내에서 ‘빽판’은 언제부터 제작되었을까? 드러내고 싶지 않은 흑역사인만큼 빽판에 대한 오해는 상당하다. 연구 대상으로 생각도 하지 않았기에 심도 있는 연구조차 없었다. 일반적으로 빽판의 전성시대는 1970~80년대로 알려졌다. 음반 미디어도 LP에 국한된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은 국내 빽판의 역사는 유성기 시대였던 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음악 장르도 팝송에 국한된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많은데, 이 또한 오해다. 해적판은 세상의 모든 장르를 담아냈다.

빽판은 크게 원판의 커버와 수록곡을 그대로 복사한 음반과 재킷 디자인부터 완전히 다르게 제작한 편집 음반으로 나눌 수 있다. 국내 팝송 문화는 빽판으로 이루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법으로 제작하고 유통했던 해적판은 부정적 이미지에도 원판과 라이선스 음반보다 아주 쌌기에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또한 들을 수 없었던 금지곡이 고스란히 담긴 것도 매력 있었다.

1950년대의 유성기 해적판

한국전쟁 후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원판 LP들이 ‘양키 시장’과 기지촌 주변에서 비싼 값으로 국내 시장으로 들어왔다. 그로 인해 1950년대 중반 이후 국내에서도 LP 보급이 이루어졌다. 불법으로 제작된 팝송 해적판의 등장은 원판을 복사해 제작한 유성기 음반과 10인치 LP들로 본격화되었다.

KBS 전속 1기 가수 출신인 옥두옥은 한국 가수 최초로 미국에서 음반을 발표했다. 해방된 뒤부터 활동했던 그녀는 재미교포와 결혼해 미국으로 이민 가 1956년과 1957년 2장의 싱글 음반을 미국에서 녹음했다. 그의 본명은 김문찬인데, 음반에는 ‘Moon Kim’으로 표기했다. 이 음반에 실린 ‘Kanda Kanda’는 장세정의 ‘역마차’를, ‘East of Make Believe’는 현인의 ‘고향만리’를 번안한 곡이다. 1958년 유니버샬레코드사는 미국에서 발표된 그녀의 노래들을 불법 유성기 음반으로 발매했다.

1950년대는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이 증언하듯 춤바람이 대단했다. 이에 댄스용 경음악과 외국영화 주제가, 인기 외국 가수들의 유성기 음반이 불법 제작되어 팔려나갔다. 국내에서 LP 제작이 시작된 1958년부터 해적판 LP도 양산되기 시작했다. 엘비스 프레슬리, 냇 킹 콜, 폴 앵카, 닐 세다카 등의 노래와 살롱용 연주 음악을 수록한 팝 LP들이 유성기 음반보다 싸게 유통되면서 국내에도 팝송 음반시장이 조금씩 형성돼갔다. 또한 이 시기 빽판들은 방송 음악 프로그램과 전국의 음악감상실, 살롱에서도 각광받으며 국내 팝송 문화 조성에 기여하기 시작했다.

납세필증까지 붙인 1960년대의 빽판

저작권 개념조차 없었던 1960년대 해적판 라벨에는 국가에서 발행하는 납세필증 인지까지 붙여 유통했다. 전국에 텔레비전 수상기 보급이 미미했던 시절에 영상을 즐길 수 있는 유일한 창구는 극장이었다. 당대의 엄청난 외국영화의 인기를 반영하듯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OST)과 열풍을 몰고온 각종 트위스트 음반들이 빽판 시장을 주도했다. 비틀스, 브렌다 리, 카니 프랜시스, 패티 페이지, 클리프 리처드 등 유명 외국 가수들, 벤처스, 빌리 본 등 악단들의 해적판 제작도 줄을 이었다. 또한 클래식, 재즈, 사이키델릭, 포크, 록, 솔, 오페라, 샹송, 칸초네, 라틴, 요들송 등 다양한 장르 음악이 인기리에 팔려나가며 장르의 다양성 확보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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빽판의 어원이 된 이미자의 <동백아가씨>

1964년에 발표된 이미자의 대표곡 ‘동백아가씨’ 열풍은 현해탄의 높은 파도를 넘었다.

1966년 일본 빅터레코드사는 2장의 <동백아가씨> 싱글 음반을 현지에서 발매했다. 일본 정서에 맞게 제목을 ‘사랑의 빨강 등불’로 바꾸고, 가수 이름도 일본식 발음인 ‘리요시코’로 소개했다.

당시는 한-일 국교 수립 이후 반일 감정이 극도로 악화한 시기다. ‘이미자가 일본말로 노래를 녹음했다’는 소문은 반일 감정 확산에 기름을 부었다. 이때 노래에 대한 비난과 호기심이 뒤섞여 일본말 ‘동백아가씨’가 수록된 황당한 가요 해적판이 등장했다.

전형적인 1960년대 편집 팝송 해적판의 뒷면에 <이미자 히바리고마도리 유행가집>이라고 쓰인 조악한 등사지가 붙은 빽판이다. 청계천의 음반 도·소매상들은 하얀 라벨의 이 음반을 ‘백반’(白盤)이라 표기했고, 처음으로 ‘빽판’으로 칭하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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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의 국내 보급에 일조했던 디제이 최동욱, 이종환

국내 최초의 전문 방송디제이로 평가받는 동아방송의 최동욱과 문화방송(MBC)의 이종환은 자신들이 진행했던 방송 프로그램의 이름을 딴 시리즈 빽판 제작을 주도했다. 음성적으로 입수한 원판들에서 빌보드 차트에 오른 히트곡과 한국인의 정서에 맞는 노래를 선곡해 제작한 이들의 편집 팝송 빽판들은 60년대 해적판 시장의 히트 상품으로 떠올랐다. 또한 두 사람은 자신들이 제작에 참여한 빽판에 수록한 팝송들을 자기가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에서 들려주며 자연스럽게 팝송을 보급하고, 저변을 확대하는 긍정적인 결과를 불러왔다.

당시 최동욱이 진행한 팝송 해적판 시리즈는 ‘탑튠 쇼’이고, 이종환이 진행한 시리즈는 ‘뮤직 다이알’ ‘탑튠 왕’ ‘오늘의 팝송’ 등이 대표적이다. 시리즈 음반들에 두 사람이 커버 모델로 여러 번 등장했던 것은 당시 그들의 인기와 이름값을 증언한다.

이후 국내 해적판 시장에는 비슷한 제목의 시리즈 해적판들이 범람했다. 미미레코드사는 방송 테이프를 입수해 ‘탑튠 쇼 36집’에 최동욱이 번안한 조영남의 ‘그린베레의 노래’ ‘월남에서 온 편지’ 등 2곡을 수록했다. 이어 신진레코드사에서 발표했던 37집에는 조영남의 ‘딜라일라’를 처음 수록해 대박을 터트렸다. 또한 36집은 레드, 37집은 그린 음반으로 제작해 국내 해적판 시장의 새로운 유행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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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ㅣ 한국대중가요연구소 대표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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