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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현장메모] ‘동영상 협박’으로 수치심 강요? 더 이상 숨지않는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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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최근 가수 구하라씨의 전 남자친구 최종범씨가 사생활 영상 유포 협박 논란을 일으킨 데 이어 팝 아티스트 낸시랭마저 남편 전준주(예명 왕진진)로부터 동영상 폭로 협박을 받았다고 밝혀 충격을 주고 있다. 그러나 주목할 만한 점은 이들이 먼저 나서서 언론과 인터뷰하는 등 숨지 않고 당당히 피해 사실을 말했다는 것이다.

이는 성범죄에서만큼은 유독 가해자보다 피해자를 손가락질하는 사회에 맞서는 행동이자 디지털 불법영상의 심각성을 수면 위로 드러내주었으며, 이러한 협박을 하면서도 오히려 더 당당한 가해남성이 지닌 ‘젠더권력’의 실체를 돌이켜볼 기회를 제공했다.

여성이 성 관련 이슈를 이야기하는 것이 부적절하고 수치스럽게 여겨진 문화 탓에 피해를 당했을 때조차 쉬쉬하고 뉴스가 알려질까 두려워 숨게 한 것이 지금까지의 관행이다. ‘수치심 강요’는 오래 전 시작된 성 착취의 역사에서 기득권이었던 남성권력이 여성을 손쉽게 통제하기 위해 심어야 했던 전략이다. 여성들이 수치스러워해야 해당 이슈를 양지에 올라오지 않도록 막고 음지에서 마음껏 향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은 갈 길이 먼 것이 사실이다. 여전히 과도기에 있는 사회는 피해여성들을 두려움과 수치심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하지 못했다. 구씨는 영상을 풀어 연예인 인생을 끝내버리겠다는 남자친구의 말에 무릎을 꿇었고, 낸시랭 역시 쌓아온 커리어를 한순간 잃을 것이란 엄청난 공포와 고통을 호소했다. 그럼에도 수치심 뒤로 숨기보다 용기 내 피해자로서 목소리를 내고자 한 것은 긍정적이고 상징적이다. 피해를 입은 이에게 비정상적으로 부여되는 수치심에 움츠러드는 한 ‘가해자 단죄’의 길 역시 멀어질 수밖에 없어서다.

세계일보

박씨가 지난 6일 서울 성북구 동덕여대 곳곳에서 알몸으로 음란행위를 한 모습을 찍어 트위터에 올린 모습. 트위터 캡처


동덕여대 알몸남이 공공장소에서 홀라당 옷을 벗어젖힐 수 있는 것, 누드 사진을 올리며 수치심이 아닌 우월감 내지 뿌듯함을 느낄 수 있는 것, 반대로 여성이 똑같은 행위를 했을 때 군중이 이를 어떻게 바라봤을지 예상되는 차이, 디지털 불법영상 속 ‘함께’ 한 행위는 왜 ‘한쪽 성별’에만 죽을 것 같은 수치심을 일으키는지 등은 모두 남성이 가진 젠더권력을 잘 보여준다.

성 관련 경험에 대해 여성에게만 수치심을 강요하는 것은 가장 교묘하고 치졸하게 젠더권력이 발현한 한 형태다. 이에 맞서는 것은 법적인 제도 마련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그보다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문제인지 모른다. 강제력을 띄는 법보다 뿌리깊게 파고드는 의식과 문화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정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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