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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참전용사 아버지 그리는 백발 남매의 '마지막 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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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때 실종된 아버지 유해 찾는 짐 엘리엇·조르자 레이번씨

추모 기념비 세워진 낙동강 방문

조선일보

1950년 8월, 유엔군의 최후 방어선인 낙동강에서 야간 순찰 나갔던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미 국방부에 따르면 6·25전쟁에 참전했다 실종된 미군 숫자는 약 8000여명. 제임스 엘리엇 미 육군 중위(당시 29세·작은 사진)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날 밤 작전에서 실종된 미군 다섯 명 중 셋은 본국에 묻혔지만, 엘리엇 중위를 포함한 둘은 돌아오지 못했다. 실종 소식을 알리는 전보(電報)만이 그해 가을 미국 집에 도착했다. 남겨진 아들이 세 살, 딸이 두 살이었다.

어느새 백발이 된 남매는 14일 본지 인터뷰에서 "시간이 지나면 상처도 노력도 무뎌질 거라고 많은 사람이 생각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아버지와의 재회를 고대하고 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아들 짐 엘리엇(71)씨와 딸 조르자 레이번(70)씨는 지난 11일 경북 칠곡군(군수 백선기)이 주최한 '낙동강 세계평화문화대축전'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행사가 열린 왜관 호국의다리(옛 왜관철교) 일대는 '낙동강 방어전투'의 격전지 중 하나로, 아버지가 실종된 장소이기도 하다.

남매가 부친의 부재(不在)를 처음 깨달은 시점은 그의 실종 6년 뒤. 딸은 "교회 성찬식에서 아버지 이름 옆에 적힌 'def unct(현존하지 않는)'란 단어를 보고 우리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 1960년대 미국에서 편부모 가정은 흔치 않았고, 어머니의 재혼 후에는 새아빠와 성(姓)이 달라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견뎌야 했다. 이후 40년간은 집안에서조차 아버지 존재를 얘기하는 게 금기시됐다. 1990년 새아빠가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그제야 엘리엇 중위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조선일보

지난 11일 경북 칠곡 왜관 호국의다리 앞에서 짐 엘리엇·조르자 레이번 남매가 낙동강을 향해 헌화하고 있다. 남매의 부친인 제임스 엘리엇 미 육군 중위는 1950년 8월 이곳에서 실종됐다. /칠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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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아버지의 흔적을 찾기 위한 남매의 노력이 시작됐다. 딸 레이번씨는 "과학수사대(CSI)처럼 작은 단서부터 파고들어갔고, 수백명을 인터뷰하면서 집요하게 취재했다"고 했다.

'전사자(戰死者) 가족' 단체의 이사회에서 활동하면서 국가보훈부, 국방부, 국립문서기록청 등을 문턱 닳도록 드나들었다. 지난 2004년에는 6·25전쟁 당시 같은 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했던 전우(戰友)들을 인터뷰했다. 이들은 "엘리엇 중위가 임시묘지로 옮겨지는 것을 봤다"고 증언했고, 그의 전사(戰死)를 메모한 수첩도 갖고 있었다. 남매는 자료들을 모아 미 국방부 산하 전쟁포로·실종자 확인국(DPAA)에 제출했다.

남매는 지난 2015년에도 국가보훈처 초청으로 왜관을 방문한 적이 있다. 한국 방문을 3개월 앞두고 암으로 사망한 모친의 유해를 담아와 낙동강에 뿌렸다. 아들은 "부친과 가장 가깝게 만났던 순간"이라고 했다. "한국의 작은 마을에서 70년 전 참전용사를 기억해주다니 고맙습니다. 꼭 한반도 평화를 이루어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해주세요."

칠곡군은 호국의다리 앞에 엘리엇 중위를 기리는 기념비를 세웠고, 남매에게 명예 군민증도 수여했다. 딸은 "6명의 손주까지 둔 노인이 됐지만 아버지와 다시 만나기 위한 노력은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녀의 사우스다코타주(州) 집 안에는 아버지를 기리는 2평짜리 추모 공간이 있고, 집 앞에는 미군 실종자를 추모하는 검은색 깃발이 나부낀다. 남매는 "우리가 포기하지 않았다는 걸 아버지도 하늘에서 알아주길 바란다"고 했다.

[김은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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