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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급물살 탄 남북관계에 후끈 달아오른 대북취재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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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한 북한의 예측불허 행동에

“우리가 기동타격대냐” 볼멘소리

탈북자 출신 기자 회담 취재 제한

통일부 조치에 기자단 “사과하라”

“유일하게 취재 접근 안되는 영역”

남측 언론 상주 취재 요청엔 난색

통일부 기자실 24시

중앙일보

9?19 평양 공동선언의 이행방안을 협의하기 위해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 고위급회담 우리 측 수석대표인 조명균 통일부 장관(가운데)이 15일 서울 삼청동 남북회담본부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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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정상회담과 당국 간 대화, 민간 차원의 교류·협력 일정이 줄을 잇고 있다. 그제 판문점에서 열린 고위급 회담은 연말까지 이어질 남북관계 시간표를 더 촘촘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김정은 연내 서울 방문’이란 빅 이벤트까지 잡혀있어 그야말로 봇물 터지듯 쏟아지게 돼 있다. 이런 흐름을 추적하며 팩트 취재와 분석에 부산한 사람들이 있다. 바로 통일부 기자실을 지키는 50개 국내 언론사 77명의 북한·통일 담당 기자들이다. 연초부터 급물살을 타고 있는 남북 관계와 대북 현안을 쫓느라 파김치가 된 통일부 기자실로 들어가 본다.

지난 7월 초 평양 통일농구대회 취재를 위해 방북한 통일부 출입 여기자는 특이한 체험에 나섰다. 현장 체험 르포기사를 쓸 요량으로 숙소인 고려호텔 미장원에서 평양식 헤어스타일에 도전한 것이다. 첫날 농구 행사가 마무리된 이튿날 한가한 시간을 틈탔다. 간단한 ‘머리빨기(삼푸)’를 한 뒤 북한 미용사가 한창 머리 손질에 공을 들일 때쯤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들렸다. “김영철이 기자실에 온대요”라는 긴급 상황전파였다. 머리에 바른 헤어제품을 제대로 걷어낼 사이도 없이 기자는 황급히 2층 프레스룸으로 달려가 김영철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의 언급 내용을 취재 수첩에 담았다. 출입 햇수로는 손꼽히는 베테랑 기자였지만 김영철의 예고 없는 방문을 예측하기는 어려웠다. 예상 밖의 돌출 변수가 끊이지 않는 북한 취재의 어려움을 드러낸 사례였다.

지난해엔 사정이 더 심했다. 연초부터 시도 때도 없이 쏘아 올린 북한의 미사일 도발 드라이브에 새벽잠을 설치거나 저녁 약속 자리에서 노트북을 켜야 했다. 핵 이슈나 대북제재와 관련해 평양 군부가 쏟아내는 협박성 주장이나 외무성의 비난 성명도 마찬가지였다. 올들어 유화 공세로 돌아선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이제 새벽잠을 설치게 하는 일은 없게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북한의 돌발행동은 그치지 않는다. 우리 측의 회담 제의에 며칠 동안 묵묵부답하다가 전날 밤 늦게서야 “내일 오전에 만나자”고 알려오는 식이다. 이를 덥석 수용하는 정부 때문에 취재기자는 모든 약속을 접고 판문점으로 향해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기자실 안에서 “우리가 기동타격대냐”는 볼멘소리가 나오는 배경이다.

광화문 정부 서울청사 6층에 자리한 통일부 기자실은 특이한 공존이 이뤄지는 공간이다. 서로 경쟁 관계에 있는 신문·방송·통신 및 인터넷 언론 소속 기자들이 한 곳에 상주하며 취재 활동을 벌인다. 자동차 업계에 비유한다면 현대와 기아, 한국GM, 쌍용과 르노삼성은 물론 수입차 업체 딜러들이 모두 어깨를 맞대면서 차량 판매에 열을 올리는 형국이다. 다른 업종에선 좀체 찾아보기 힘든 광경이다. A4용지 6장 남짓한 면적의 좁은 칸막이 책상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모습은 마치 독서실이나 고시원을 떠올리게 한다. 부처 대변인이나 당국자 브리핑과 쏟아지는 각종 보도자료를 챙기기도 빠듯한 시간이지만 특종 경쟁을 위해 익명의 취재원을 만나고 관련 기사를 다른 기자가 눈치채지 못하게 은밀하게 전송해야 한다. 옆 사람의 노트북이나 취재수첩·핸드폰에 눈길을 주는 게 절대 금기인 것도 이런 사정에서다. 단독기사를 써낸 기자는 의기양양하며 부러움을 살 수 있지만, 낙종의 아픔은 데스크의 불벼락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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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취재 최전선 맡은 통일부 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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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 주무부처라는 특성 때문에 통일부와의 일부 공조도 불가피하다. 당국 회담 취재를 가는 방북 기자단은 ‘보도’라 쓰인 완장 외에 가슴에 태극기 배지를 단다. 김일성 배지(북측은 ‘초상휘장’이라고 지칭)를 패용하는 북한에 상응하는 조치다. 회담 관계자는 “태극기를 단다는 건 우리 대표단의 일원이란 의미”라고 설명했다. 그만큼 남북관계 취재에 있어 언론과의 교감이 긴요하다는 취지다. 하지만 회담 합의 내용이나 대북 대응에서 문제점이 드러나면 비판의 칼날을 감추지 않는다.

15일 판문점 남측 평화의 집에서 열린 남북 고위급 회담에 탈북자 출신 기자를 배제한 통일부 조치에 기자단이 ‘입장문’을 내고 조명균 장관의 사과를 요구한 것도 정부가 대북 저자세를 보였다는 판단에서다. 북한 엘리트 출신인 해당 기자는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 뒤 6년째 통일부를 출입하며 북한 문제를 담당했다. 특히 지난 2월에는 평창 겨울올림픽을 계기로 방문한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과 북측 수행원·기자단을 밀착 취재했다. 우리와 유엔사가 관장하는 판문점 남측 지역에서 열리는 회담에 탈북자란 이유로 배제한 건 지나쳤다는 게 기자단의 문제 제기다. 더욱이 언론사들이 사전 합의에 따라 대표 취재를 맡긴 풀(pool)기자였다는 점에서 언론 자유 침해에 해당한다는 지적이다.

통일부와 기자단 안팎에선 조명균 통일장관이 독자적으로 탈북자 출신 기자의 취재를 막았을 가능성은 낮다는 지적이 나온다. 북한의 반발 가능성과 함께 탈북자를 ‘배신자이자 인간 쓰레기’로 비난해온 일부 세력의 입김이 작용한 게 아니냐는 얘기다. 대북 눈치 보기 비판여론에 시달린 노무현 정부 때보다도 훨씬 후퇴했다는 말도 나온다. 2006년 5월 개성공단 방북 취재에 나선 통일부 기자단 일부를 북측이 거부하자 이종석 당시 장관은 “이런 식으로 선별 조치하면 기자들 앞에서 내 얼굴이 뭐가 되냐”고 따졌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북측은 “뭐가 착오가 있었다”고 둘러대며 즉각 수용조치를 취했다.

북한 문제를 담당하는 기자들 사이에선 “유일하게 취재원 접근이 안 되는 영역”이란 말이 나온다. 구체적인 사실관계 확인이나 현장접근, 반론 취재는 엄두를 내기 어렵다는 측면에서다. 2010년 북한의 천안함 폭침 도발에 대응한 5.24 대북제재 조치의 최대 피해자는 언론이란 지적도 제기된다. 방북 취재기의 파급력 등을 고려해 정부가 언론의 대북접근을 가급적 차단하는 정책을 취한 때문이다. 평양을 자유롭게 오가며 현장 취재할 수 있는 건 남북 관계가 화해 무드를 타고 있는 지금도 꿈같은 일이다. 김정은 집권 이후 체제선전 차원에서 일부 서방매체나 친북 성향 교포 언론인을 받아들였지만 남한 언론사나 기자는 예외다.

지난 4월 문재인 정부 첫 정상회담 이후 개별 언론사나 언론단체가 평양에 지국을 설치하거나 상주 취재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지만 북측은 선뜻 호응하지 않고 있다. 최근 방북해 통일전선부 최고위급과 만난 해외교포 인사는 “김정은 체제의 이미지를 선전할 수 있는 우호 매체의 단발성 취재는 사안별로 검토하겠지만, 남측 언론이 북한에 상주하는 건 허용할 수 없는 일이란 입장을 분명히 하더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신문·방송을 ‘체제 선전·선동의 나팔수’ 정도로 여기는 북한과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권력 비판·견제를 언론의 사명으로 삼는 우리와는 좁혀지기 쉽지 않은 간극이 자리하고 있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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