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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뭘 도와줘?” “시말서 써놔!”…막돼먹은 고객에게도 “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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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쇼윈도 노동의 눈물] 백화점 노동자 수난 백태

‘갑질’ ‘진상’ 어이없는 행패에도

“정말 죄송합니다 고객님”만 반복

“갑질 부리는 고객들도 문제지만

문제 방치하는 사업주 처벌 강화해야”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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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 창고에는 물건만 쌓이지 않는다. 환한 조명 아래에 ‘미소’를 ‘디스플레이’해야 하는 백화점 판매 노동자들은 창고에서만 운다. 백화점 창고에는 웃음을 내려놓은 노동자들의 눈물이 쌓인다.

<한겨레>는 ‘전국서비스산업노동조합연맹’(서비스연맹)을 통해 백화점 화장품 판매 노동자들의 ‘고객 응대 피해 사례’ 140여건을 입수했다. 한자씩 눌러쓴 글에는 자존감을 버려야 했던 숱한 기억들이 담겨 있었다. 성희롱을 당한 경험과 험한 욕설을 들은 기억을 풀어놓으면서도, 그들은 꼬박꼬박 상대를 ‘고객님’이라고 적었다.

■ “시말서 써놓고 기다려” “환영합니다.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화장품 매장에서 일하는 김연지(가명. 이하 모두 가명)씨는 매장에 들어오는 고객님에게 환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하지만 김씨의 친절한 인사는 고객님의 기분을 거슬렀다. “네가 나를 뭘 도와줘? 물건 팔아주면 내가 너를 도와주는 거지, 네가 뭔데 나를 도와준다는 말이야?” 브이아이피(VIP) 고객이라는 그는 백화점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소리를 질렀다.

또 다른 백화점 노동자 강민정씨는 매장으로 걸려온 한 남성 고객님의 전화를 받았다가 곤욕을 치렀다. 전화기에 상대 휴대전화 번호가 떴지만, 누군지는 알지 못했다. 통화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고객님은 기분 나쁜 목소리로 말했다. “너 누구야? 나 몰라? 너 누군지 내가 알아봐서 백화점 일 다시 못 하게 컴플레인 할 거야. 시말서 쓰고 기다려.” 강씨는 그제야 상대가 누군지 알아차렸다. 종종 들러 스킨케어 제품을 사 가던 그 고객님은 평소에도 매장에 발을 들이자마자 직원들이 인사를 하지 않으면 신경질을 내던 인물이었다. 강씨가 자신의 전화번호를 외우고 있지 않은 것에 화가 난 것이다. 별도리가 없었다. 강씨는 그 고객님에게 수차례 전화를 걸어 사과한 뒤에야 ‘용서’를 받을 수 있었다.

‘물건을 팔아주는 사람’에게만 잘해서도 안 된다. 화장품 매장을 지키던 고현지씨 앞으로 한 남성 고객님이 왔다. 고객님은 다른 화장품 매장의 위치를 물었다. 고씨는 동료와 나누던 대화를 멈추고 고객님께 길을 안내했다. 하지만 잠시 뒤 그 고객님은 고씨를 찾아와 명찰을 힐끔 확인하고 돌아갔다. 이상한 행동에 대한 의문은 곧 풀렸다. 그는 백화점에 컴플레인(항의·불만제기)을 넣었다. 고씨가 자신의 아내를 비웃듯이 쳐다봤다는 것이었다. 고씨는 그의 부인을 보지도 못했지만, 고객님은 친필로 쓴 사과 편지를 요구했다. 결국 고씨는 얼굴도 보지 못한 고객님 부인의 건강과 안부를 묻고 사과의 마음을 담은 편지를 써서 등기우편으로 보냈다.

때론 선의도 트집이 잡힌다. 임민아씨는 매장에서 물건을 찾는 고객님에게 잠시만 자리에 앉아서 기다려 달라고 했다. 물건을 찾는 동안 편히 앉아 계시라는 취지였다. 하지만 “싸가지 없이 네가 뭔데 착석을 권유하냐”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고객님은 백화점 담당을 부른 뒤 “이○이 ‘싸가지’ 없는 말투로 ‘고객님 여기 앉으세요’라고 말했다”며 “내가 집에서도 스트레스를 받는데 여기서도 무시를 당해야 하느냐”고 소리를 질렀다. 백화점 담당은 사과를 재촉했고, 임씨는 도대체 어떤 대목에서 ‘싸가지’가 없었는지도 모른 채 고개를 숙여야 했다. 억울함은 창고에서 우는 것으로 풀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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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년 전 제품 환불 요구에도 “죄송합니다” 백화점에서 일하면서 가장 괴로운 일 중 하나는 교환·환불이 되지 않는 제품을 들고 와 무리한 요구를 할 때다. 민수지씨에게는 립스틱 교환을 요구하는 모녀가 찾아왔다. 제품 상태를 보니 이미 발라 본 흔적이 있었다. “고객님. 죄송하지만 사용한 립스틱은 교환이 어렵습니다.” 민씨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고객님은 소리를 질렀다. “사용은 무슨 사용이야. 손등에 발라본 게 다야. 입술에 바른 것과 손등에 바른 것이 같아?” ‘개봉 후 사용’이란 측면에서 다를 리 없지만, ‘우기기’는 계속됐다. “자꾸 안 된다고 하지만 말고, 당신이 이걸 산 다음에 나한테 다른 거로 바꿔주면 되잖아.” 지지 않으면 끝날 수 없는 싸움이었다. 민씨가 ‘본사에 문의해보겠다’라고 달랜 뒤에야 고객님은 집으로 돌아갔다.

한번 사용하고 교환을 요구하는 것은 ‘양호한’ 축에 낀다. 오지영씨의 매장에 들어선 고객님의 손에는 립스틱 하나가 들려 있었다. 고객님은 교환을 요구했다. 뚜껑을 열어보니 립스틱은 5분의 1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언제 구매하셨는지 묻자 2년 전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죄송하지만 교환이 어렵습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고객님은 립스틱을 바닥에 던지며 저주를 퍼부었다.

불운이 겹치는 경우도 있다. 한민영씨가 일하던 매장을 찾은 70대 여성 고객님은 이미 사용한 화장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교환을 요구했다. 이미 사용한 제품은 교환이 어렵다고 설명했지만, 고객님은 막무가내였다. 진이 빠지기 시작할 때쯤, 갑자기 들려온 “퍽” 소리에 한씨는 깜짝 놀랐다. 옆에 있던 고객용 의자에 핸드백이 하나 날아들었고, 곧바로 욕설이 뒤를 이었다. “야 이○아. 너 이리 와. 넌 오늘 죽었어.” 정신이 없어 무료 샘플을 받기 위해 기다리던 고객님을 놓친 것이다. 한씨는 “먼저 오신 고객님을 응대하느라 미처 오신 줄 몰라 죄송하다”며 바로 샘플을 전달했지만 소용없었다. “내가 이깟 샘플 때문에 그런 줄 알아 이 싸가지 없는 ○아.” 샘플이 다시 한씨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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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폭력도 참을 수밖에… 정영신씨가 일하던 향수 매장에는 매일 똑같은 복장으로 백화점을 찾는 중년 남성 고객님이 있었다. 하루는 고객님이 정씨의 손을 잡아끌었다. “며칠 양치를 안 했는데 이리 와서 냄새가 나는지 맡아봐.” 그게 끝이 아니었다. 정씨에게서 나는 향기가 너무 좋다며 코를 들이댔고, 시향지(향수를 묻혀 향을 맡아보는 종이)를 건넬 때마다 손을 잡으려 했다. 정씨는 고객님을 응대하는 스스로가 비참했다고 적었다.

‘컴플레인’ 과정에서도 성추행은 발생한다. 황지민씨가 일하던 매장에 70대 할아버지가 이미 사용한 향수를 바꿔달라고 찾아왔다. “교환이 어렵다”고 하니 “내가 원래 쓰던 것이 아니니까 무조건 교환하라”며 소리를 질렀다. 오랫동안 소리를 지르고도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고객님은 고객상담실이 어디냐고 황씨의 명찰이 달린 가슴 쪽을 툭툭 건드리기 시작했다. 경찰에 신고하고 싶었지만, 정작 황씨가 해야 했던 일은 “죄송하다”고 사과하는 것이었다.

언어적 성폭력은 일상적이다. “어떤 립스틱이 맛있냐? 내가 먹을 거니까 맛있는 걸로 달라.” “(얼굴도 예쁜데) 왜 이런 데서 일하냐. 술집에서 일하지.” 백화점 노동자들이 견뎌내야만 했던 언어 성폭력 사례들이다. 백화점에서 일한다고 감정이 없을 수 없다. 욕설을 들으면 기분이 나쁘고, 맞으면 아프고, 성희롱을 당하면 분하다. “클레임 고객을 만날 때마다 위경련 같은 고통이 명치 끝에서 느껴지면서 눈물이 뚝뚝 떨어집니다.” “왜 이런 모욕을 당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고객 응대 피해 사례’를 적은 140여개의 글에서 그들은 “우리도 사람”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정경윤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정책기획국장은 “백화점·면세점 판매 노동자들을 함부로 대하는 고객도 문제지만, 노동자들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는 회사의 책임도 크다. 대형 유통업체 등 원청이 판매 서비스 노동자들의 피해를 방치할 경우 처벌하는 강력한 감정노동자 보호법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정환봉 최민영 기자 bon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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