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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정리뉴스]‘5·18 북한군 개입설’은 완전한 거짓···보수세력이 부풀리고 전두환이 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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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84년 9월7일 전두환 전 대통령 내외가 일본 도쿄를 방문해 영접 나온 교포들을향해 밝은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어보이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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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 전사(前史)>는 전두환 정권의 제5공화국 출범 이전까지의 정치적 상황을 기록한 책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게 된 과정을 찬양한 <용비어천가>처럼,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가 10·26 사태 이후 어떻게 ‘불가피’하게 등장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하고 정당화한다.

누가 이 책을 썼는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당시 군 실세가 아니면 알 수 없는 내용과, 관련자 수백명의 증언을 청취했다는 점에서 전두환을 비롯한 5공화국 주도 세력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 편찬됐으리라 짐작된다.

그동안 <5공 전사>는 ‘비밀 아닌 비밀’이나 마찬가지였다. ‘비밀’ 등급이 매겨진 문서는 아니었지만, 한번도 전문이 외부에 공개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경향신문은 1년5개월여에 걸친 국방부에 대한 정보공개청구와 소송을 통해 3800쪽 분량의 책 9권 전권을 확보했다. 10회까지 이어지는 기획 보도의 핵심 내용을 연이어 전한다.

■20년전 역사에 등장한 <5공 전사>… 시작부터 ‘신군부 찬양’

경향신문

5공화국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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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 전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0·26 사태 이후 국가 지도력의 공백과 급진적인 자유화 물결에 편승한 각종 소요로 사회가 혼란하여 국가 자체가 위태로워지자 계엄 상황하에서 12·12 사건을 슬기롭게 극복한 주역들이 자연히 사회 안정과 혁신의 중심 세력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12·12 사건을 슬기롭게 극복한 주역’이란, 즉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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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군 회의에 참석한 적 없다”던 전두환의 ‘거짓말’

경향신문

경향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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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전 대통령은 그동안 5·18과 자신의 연관성을 모두 부인해왔다. 그는 지난해 펴낸 <전두환 회고록>에서 “나는 계엄군의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지시하거나 실행하기 위한 그 어떤 회의에도 참석할 수 없었고 참석한 일이 없다”고 주장했다.

<5공 전사>는 어떻게 기록했을까. 당시 군 지휘부의 움직임을 담고 있는 ‘계엄당국의 적극 대처’ 부분을 보겠다.

“(5월)19일부터 전례없이 매 격일마다 국방장관을 비롯한 합참의장, 연합사 부사령관, 육·해·공군참모총장, 보안사령관, 수경사령관, 특전사령관 등 군 수뇌부가 국방부 회의실에 모여 2군사령부와 광주의 전투교육사령부로부터 올라오는 매일의 상황보고에 따라 사태에 대한 대책을 논의·결정하였다… 이들의 논의는 신중하면서도 진지한 것이었다.”

당시 보안사령관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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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하면, 몸통은 ‘전 장군’이다

경향신문

김용민의 그림마당 2018년 10월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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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5·18) 치유와 위무를 위한 씻김굿에 내놓을 제물이다. 나의 유죄를 전제로 만들어진 5·18특별법과 그에 근거한 수사와 재판에서조차도 광주사태 때 계엄군의 투입과 현지에서의 작전지휘에 내가 관여했다는 증거를 찾으려는 집요한 추궁이 전개됐지만 모두 실패했다.”

5·18에 전두환 전 대통령이 개입했다는 증거는 <5공 전사>에 나온다. ‘전 장군’은 <5공 전사> 5·18 부분에서 모두 3번 직접 언급된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발포명령과 다름없는 계엄군의 자위권 발동을 결정하는 회의에도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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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김부겸·유시민·백남기…’ 신군부 ‘학원사찰 계보도’ 첫 공개

경향신문

<5공 전사> 부록 2편 665쪽 ‘경희대 학원사태 주동자 계보도’. 맨 위 법대 4학년 ‘文○○’이 문재인 대통령이다. 강윤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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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가 민주화 운동은) 불순분자의 배후 조종이다… 계엄당국에서는 경찰로는 더 이상 학원소요의 저지가 불가능하므로 군의 투입이 불가피해질 것으로 판단(했다).”

전두환 신군부는 1980년 5월 전국 26개 대학 교수·학생 458명을 담은 학원사태 주동자 계보도를 작성해 대대적인 체포·사찰에 나섰다. 학생들의 민주화운동을 무력화하기 위해서였다.

‘경희대 계보도’ 가장 위에는 ‘除籍復學生(제적복학생)’ 바로 아래에 “文在寅(문재인)·法(법)4”라고 쓰여 있다. 서울대 계보도에는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심재철 자유한국당 국회의원 등이 포함됐다. 설훈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고려대), 전여옥 전 국회의원(이화여대), 고 백남기 농민(중앙대) 등도 대학별 계보도에 들어있다.


관련 기사- ‘문재인·김부겸·유시민·백남기…’ 신군부 ‘학원사찰 계보도’ 첫 공개


■전두환 주도로 내린 결론, ‘비상계엄 전국 확대’

경향신문

1998년 9월23일 전두환 전 대통령이 부산을 방문해 대한불교 총지종 부산정각사에서 열린 ‘국난극복을 위한 참회 대법회’에 참석하여 합장하고 있다. 서성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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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장군은 (학원소요) 사태가 이렇게 발전하다가는 국가가 존망의 기로에 놓이게 되리라고 판단했다… 계엄을 전국 비상계엄으로 확대 선포하고 소요의 근원은 물론 사회불안요소의 제거조치가 불가피하다.”

<5공 전사>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합수본부 중정부국장에게 정세분석팀을 구성토록 지시한 과정이 나와 있다. 이 팀에서 내린 결론이 ‘비상계엄 전국 확대’다.

학생들의 시위 대상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었지만, <5공 전사>는 부정적 맥락에서 전 전 대통령을 언급하길 꺼렸다. ‘전두환’ 이름 석자는 ‘○○○’으로 표현됐다.


관련 기사- 학생운동을 “적화통일 지향” 규정…시위 타깃인 전두환은 ○○○으로 간접 표현


■‘상부 명령’ 없이 현장 지휘관이 발포했다고?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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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군부는 “전남도청 앞에서의 집단발포는 상부 지시가 아닌 현장 지휘관(대대장)의 판단에 따른 자위권 발동”이라고 주장한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광주에 출동한 계엄군은 계엄사령관이나 상급 작전지휘권자의 자위권 발동 지시가 없더라도 당연히 ‘정당방위권’과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적었다.

<5공 전사>는 어떻게 기록했을까.

“2군사에서는 참모총장을 뵙고 자위권 발동을 건의하였다. 참모총장 이희성 장군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라고 하면서 장관에게 보고하자고 했다.”

‘자위권’은 계엄군 최고 지휘관도 혼자 결정할 수 없는 문제였다는 취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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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사- 상부 지시로 광주역서 첫 발포…신군부 핵심이 증언 ‘물증’


■강경 진압 주저하면 ‘박탈’, 과격 진압은 ‘정당화’

경향신문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 투입된 7공수 부대원들이 1980년 5월18일 금남로에서 대검을 착검한 채 광주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있다. 광주에 가장 먼저 투입된 7공수는 5·18진압작전이 종료된 이후에도 열흘 동안 광주에 남아 무등산 등에서 작전을 계속했다.│고 신복진 사진가 가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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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등 신군부는 5·18 진압에 비교적 온건한 성향을 보인 일반 부대 지휘관들에 대해서는 ‘우유부단하고 기회주의적인 태도로 일관했다’며 맹비난했다. 그러면서 과격 진압은 정당화했다. <5공 전사> 내용이다.

“공수부대 계엄군들의 데모 진압 방식은 경찰의 그것에 비하여 매우 강력한 것이었다. 그들은 시위학생들의 해산과 그들의 체포에 주력하였다. 계엄군들은 인상착의가 학생처럼 보이면 일단 시위혐의자로 간주하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거칠어질 수밖에 없었다. 반항하는 난동자들은 곤봉으로 맞았고 구경하던 부녀자들이 떠밀려 넘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이같은 강경 진압의 결과는 ‘자랑’했다.

“계엄군의 조직적인 진압 작전으로 오후 5시까지 경찰은 52명을 검거했지만 7공수는 출동 1시간 만에 149명을 검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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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북한군 개입’ 부정한 신군부

경향신문

5·18 당시 북한군 특수부대가 광주에 투입됐다고 주장하는 일부 세력들이 ‘광주에 투입된 북한군’이라고 주장하는 사진. 이들은 황장엽(71번)과 오극렬(73번), 리선권(75번) 등이 광주에 왔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평범한 광주시민들이었다. 71번은 박남선, 73번은 지용, 75번은 홍흥준씨로 확인됐다. 5·18기념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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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전 대통령은 지난해 회고록에서 5·18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했다. “북한 특수군이 아세아자동차에 집결해 장갑차를 끌고 나갔다”거나 “대검을 사용해 시민을 살해한 것은 계엄군이 아닌 북한 특수군” 등이다.

<5공 전사>에는 5·18 당시 북한이 개입했거나 무장공비 등이 침투했다는 기록이 없다. 오히려 이를 부정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

“만일 광주사태 기간 중 무장공비들이 대거 침투하여 폭동사태에 가세했었다면 광주사태는 더욱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되었을 것임은 물론 국가의 생존마저 위협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형태의 사회적 소요나 폭력사태도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광주에 무장공비가 침투했더라면”이라는 ‘만약’ 서술은 즉 결국 ‘북한군 개입설’은 사실이 아니라는 뜻이다.

신군부는 5·18의 가장 큰 원인으로 ‘북한군 개입’이 아닌 “박정희 정권에서 기인한 ‘지역감정’ ”을 꼽았다. 다음과 같다.

“광주유혈소요사태의 주요 발단 동기는 다년간 누적되었던 지역감정이고 5·17조치로 김대중이 연행되자 호남인들을 탄압하는 것으로 판단하였고 이러한 상황을 악용한 김대중 추종세력의 사태악화 유도 및 배후조정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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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김서영 기자 westzer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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