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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뉴스AS] 이외수 ‘단풍’ 글 논란… ‘여성혐오’ 없이 문학 못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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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AS]

한겨레

작가 이외수씨가 강원도 화천 감성마을에서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화천/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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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

저 년이 아무리 예쁘게 단장을 하고 치맛자락을 살랑거리며 화냥기를 드러내 보여도 절대로 거들떠 보지 말아라. 저 년은 지금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명심해라. 저 년이 떠난 뒤에는 이내 겨울이 닥칠 것이고 날이면 날마다 너만 외로움에 절어서 술독에 빠져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지난 10일 ‘단풍’을 두고 작가 이외수씨가 에스엔에스(SNS) 올린 글이 인터넷 공간을 달궜습니다. 단풍의 아름다움을 비유하며 여성에 대한 멸칭을 사용한 것을 보고 누리꾼들이 즉각 항의한 겁니다. 몇몇 누리꾼들은 그의 시를 ‘미러링’(주체와 대상을 바꾼 표현방식)하며 반박하기도 했습니다. 이씨가 “여성을 비하할 의도나 남성우월을 표출할 의도는 추호도 없었다”고 해명했지만, 누리꾼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본인의 글에서 여성 비하를 느끼고 불쾌함을 토로하는 상황임에도 사과 한 줄을 적지 못한다”(@che*****), “의도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젠더 감수성이 없었던 것”(@ri_ca*******), “여성 인권 문제가 심각한 문제로 다루어지고 있는 이유는 그런 의도 없이도 (여성 혐오적인 표현이) 자연스럽게 다루어지고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지식인을 표방하는 사람이라면 더 조심해야 한다”(@labe*********)며 재차 비판했지요. 그리고 이씨는 그런 사람들의 계정을 ‘차단’하는 것으로 응수했습니다.

한겨레

이외수씨가 지난 10일 자신의 트위터에 올렸던 글. 트위터 갈무리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이씨의 글은 ‘한국문학 속 여성혐오’란 주제를 다시 논의의 장으로 끌고 왔습니다. 2016년 처음 문단 내 여성혐오에 대해, ‘#문단_내_성폭력’ 문제에 대해 고발이 나왔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후 문단 안팎에서는 여성주의적인 시각으로 문학 작품을 다시 읽으려는 움직임이 이뤄져 왔습니다.

■ ‘문학의 여성혐오’는 뭔가요?

문학 속 ‘여성혐오’는 문자 그대로 ‘혐오표현’만을 사용하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여성의 신체를 대상화하거나 도구적 존재로 사용하는 것, 작품 내에서 여성을 단지 성적으로만 소비하거나 주변화하는 것 등이 모두 포함됩니다. 남성의 시선에서 여성의 신체를 관음적으로 묘사하는 방식이 대표적입니다. 시인 복효근씨의 ‘목련꽃 브라자’나 장석남씨의 ‘꽃이 무거운 꽃나무여’ 같은 작품 역시 이외수씨와 비슷한 경우입니다.



목련꽃 목련꽃

예쁘단대도

시방

우리 선혜 앞가슴에 벙그는

목련송이만 할까

고 가시내

내 볼까봐 기겁을 해도

빨랫줄에 널린 니 브라자 보면

내 다 알지

목련꽃 두 송이처럼이나

눈부신

하냥 눈부신

저……

-‘목련꽃 브라자’ (복효근)





꽃이 무거워 가지가 휘는 작은 나무여

첫 꽃 핀 꽃사과여

그 꽃의 중량을 가늠해 보니

처음 업어보는 처녀의 무게만하겠네

처음 배에 올려보는 여자의 희고 미끄러운 허벅지 무게만하겠네

꽃이 무거워 가지가 휘는 작은 꽃나무여

꽃 떨구고 하늘로 솟을라나?

혼이 난 김에 아주 솟아갈라나?

숭굴숭굴한 자주 이들의 무게여

나의 몸살도 저를 닮아서

문고리를 채우네

-‘꽃이 무거운 꽃나무여’ (장석남)

문학 속 ‘여성혐오’의 의미를 넓게 보면, 남성과 여성에게 차등적인 가치를 부여하거나 여성을 보조적인 존재로만 그리는 경우도 포함됩니다. 작가 손아람씨가 작가 김훈씨의 소설 <칼의 노래>를 비평적으로 읽어낸 글에서 그런 비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가 죽인 아베의 눈동자와

아베가 죽인 면의 젖냄새와

적에게 끌려가 죽은 여진의 젓국 냄새

그리고 또 내가 시켜서 목베어 죽인

내 부하들의 잘린 머리의 뜬 눈이 떠오를 때

지나간 전투의 기억은 계통없이 되살아났다.

(중략)

그 여자의 몸은 더러웠다.

다리 사이에서 지독한 젓국 냄새가 퍼져나왔다.

새벽에 나는 품속의 여진에게 물었다.

밝는 날 어디로 가겠느냐. 나의 실수였다.

나으리, 밝는 날 저를 베어주시어요.

그 여자의 목소리는 진실로 베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김훈 <칼의 노래> 중

손씨는 책 <지금 여기의 페미니즘X민주주의>에서 <칼의 노래>를 예시로 들며 “남성인물들의 무화된 가치는 ‘생명력’인데 여진의 가치는 ‘생식적 매력’이다. 생명을 지키기 위한 싸움 속에서 어이없게 생명을 잃는 남성 인물들과 달리, 여진은 생식적 매력을 잃었을 때 자신을 베어달라고 부탁한다”며 “가치들의 우선순위를 뒤섞어 붕괴시키며 허무주의를 말하는 김훈의 세계관이 일관되어 보이지 않는 이유는, 그가 붕괴시키는 가치에는 정작 우선순위가 남아있다는 점 때문이다. (그는) 남성의 가치와 여성의 가치를 차별적으로 다루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한겨레

이외수씨가 페이스북에 남긴 글


■ “예술이 금기를 건드릴 때는 그것이 정당하다는 걸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

문제는 문학 속 ‘여성혐오’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외수씨의 ‘화냥기’ 표현을 두고 논란이 더 커진 건 비판하는 사람을 무작정 “청맹과니”, “독서량이 부족한 사람”, “한글을 쓸 줄 아는 벌레”라고 지칭하며 “난독증이 심하다”, “행간을 읽어내는 능력이 부족하다”라고 비난한 이씨 본인 때문입니다.

여기에 이씨를 옹호하고 나선 몇몇 남성 시인들의 주장도 사태를 키웠습니다. 류근 시인은 SNS에 “문학이 버려야 할 말이 너무 많아졌다. (이씨의 표현을 ‘여성혐오’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중국의 문화혁명 결과가 지금 중국의 천민성을 만든 거라는 사실을 좀 알았으면 싶다”고 했습니다. 이원규 시인은 “국어사전에 나오는 ‘화냥기’나 ‘난봉꾼’이나 쓰면 안되는 말인가. 나도 언젠가 보름달을 보고 ‘저 년, 애 밴 년’이라고 했는데 돌 맞아 죽겠다”며 이같은 비판을 “매카시즘 같은 광풍”에 견줬습니다.

사실 남성 중심적인 서사를 골격으로 이어져 왔던 한국의 근현대문학사를 돌이키면 이런 시인들의 푸념이 아주 새로운 풍경은 아닙니다. 문화연구자 오혜진씨는 민주화 이전의 한국문학이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 비하, 조롱을 별문제 없이 사용할 수 있었고, 신자유주의 시대에도 그 시절의 정서를 그리워하는 풍조가 이어져 왔다고 분석합니다.



“예컨대 소위 ‘이야기꾼’들의 작품에 ‘질펀하게’ 구사되는 ‘상스러운’ 말투와 유머들은 대체로 ‘민중에 대한 격식 없는 애착’의 표현으로 이해돼 왔지만, 여기에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어떤 구애도 받지 않은 채 여성·성소수자·장애인·저학력자·가난한 자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과 비하, 조롱 등을 무람없이 할 수 있었던 ‘민주화 이전’의 시절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개재해 있다. 적자생존 논리로 대표되는 ‘팍팍한’ 신자유주의 시대에 자신을 ‘정상’ 혹은 ‘강자’로 간주할 수 있었던 시절의 정서가 ‘인간적인 것’, ‘순수한 것’ 등으로 간주되며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경우는 흔하다.” -책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그런데도 이런 비판을 두고 여전히 지나치게 예민한 사람들의 ‘딴지걸기’라는 의견들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계간 <황해문화> 편집주간인 문학평론가 김명인 인하대 교수는 이에 대해 “그것(‘화냥기’ 같은 단어) 말고도 (작가가)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많다”고 꼬집습니다. 그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예술이) 금기를 건드릴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새로운 윤리를 구축하고 그 윤리가 정당하다는 걸 자신이 입증할 수 있을 때 가능한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만약 지금이 여성이 지배하는, ‘가모장’ 사회라고 한다면 (‘화냥기’와 같은) 그런 식의 표현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요.”

김 교수는 “약자를 놓고 희롱하는 언어가 ‘금기를 깨는 표현’을 제약한다고 말할 순 없다. 표현의 영역을 확장하는 이유가 정확하게 있지 않으면 ‘클리셰’이고 상투적인 표현일 뿐이다. 결국 기존의 지배체계를 옹호하는 게 된다”고도 덧붙였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이 페미니즘이 강한 시대라고 해서 (페미니즘 관련 지적을) 눈치 보는 걸 ‘표현을 못 하게 됐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오해죠. 페미니즘이 (사회에) 지배적인 사상이 아니라 이제 막 자기 표현을 얻은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걸 가지고 (여성 혐오적인 단어를 쓰는걸) 마치 ‘페미니즘에 대한 저항’이란 식으로 이야기하는 건 잘못된 겁니다.”

기성 문단과는 다른 방식의 문학을 꿈꾸며 활동하는 젊은 문학인들 역시 “이제는 그런 시대가 아니”라고 입을 모읍니다.



“지금까지는 남성이 여성에 대해 하는 말들이 곧 진리이고 예술이라고 통용됐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제는 통하지 않는다. (그러한 표현) 대부분이 성을 멸시하는 젠더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프로젝트그룹 ‘우롱센텐스’

“문학마다 제 안에 품고 가는 ‘시절의 감정’이 있는데, 어떤 세대에겐 해학과 호기로 통할 수도 있었을 감정이 시대가 바뀌면 민망한 허세로 보인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관점과 감정을 체화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같은 표현을) 둔감하게 반복하며 지겨움과 민망함을 유발하는 이들도 있다.”

-독립문예지 ‘베개’ 편집팀

“여성 혐오적인 표현을 기존의 가부장적 사고방식에 기초한 글쓰기에서 빼놓아서는 안 되는 필수 요소처럼 사용하고, 이에 대한 지적을 표현의 자유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작가가 세상을 보는 낡은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방증에 불과하다. 페미니즘이 (한국사회에) 대두한 뒤 독자들은 더 이상 그들의 독자가 되려하지 않을 것이다.”

-독립잡지 ‘소녀문학’ 편집팀

사실 이외수씨가 ‘단풍’을 ‘화냥기’에 빗댄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2012년 <경향신문>과의 인터뷰를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그가 트위터에 올린 것처럼 ‘감성마을 꽃단풍은 화냥기에 미쳐가고’ 있었다.”

6년 전엔 같은 표현이 트위터에 게재되고, 심지어 언론 인터뷰에 실렸어도 큰 논란이 불거지진 않았습니다. 단지 6년 동안 시대가, 사회가, 독자의 관점이 변했다는 걸 이번 일이 보여주는 셈입니다. 작가가 ‘시대의 행간’을 놓칠 때 어떤 일이 발생할 수 있는지도요. 독립잡지 ‘소녀문학’ 편집팀은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문학과 작가 자신이 새로움은커녕 고루한 사고방식에 얽매인 글을 생산해 낼 수 있다는 자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 글 중 일부는 이제 소수자 혐오와 긴밀하게 연결될 수 있다는 것도요. 독자를 두려워할 줄 알아야합니다. 작가는 애초에 가르치는 존재가 아니니까요.”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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