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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His 스토리] MS 성공 神話 쓴 ‘아이디어 맨’ 폴 앨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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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게이츠와 미국 IT(정보기술) 기업 마이크로소프트(MS)를 공동 창업해 신화(神話)를 써 내려간 폴 앨런이 15일(현지 시각) 65세로 미국 워싱턴주(州) 시애틀에서 숨을 거뒀다. 혈액암의 일종인 비(非)호지킨 림프종 재발 사실을 알린 지 2주 만이다.

앨런의 여동생인 조디 앨런은 이날 성명을 내고 "많은 사람이 폴 앨런을 기술자이자 자선사업가로 알고 있지만 그는 우리에게 사랑이 넘쳤던 형제이자 삼촌, 특별한 친구였다. 폴은 많은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항상 가족과 친구를 위한 시간을 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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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IT 기업 마이크로소프트 공동 창업자인 폴 앨런이 2018년 10월 15일 65세로 숨졌다. /앨런 트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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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 이름 앞에는 항상 ‘MS 공동창업자’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그는 1975년 어릴 적 친구인 게이츠와 함께 의기투합해 MS를 세웠다. 사티아 나델라 현 MS 최고경영자(CEO)는 앨런을 "조용하고 끈질긴 방식으로 마법 같은 제품과 경험을 만들었다"고 회상하며 "그렇게 그는 세상을 변화시켰다"고 평했다.

평생 미혼으로 산 그는 ‘괴짜 행보’로도 잘 알려져 있다. 1983년 비호지킨 림프종이 발병한 후 MS를 떠났던 앨런은 사업가와 자선가로 활동했다. 그는 미국프로농구(NBA)와 미국 프로미식축구(NFL) 구단주가 되기도 했고, 세계 최대 비행기를 만들기도 했다. 또 과학 분야에 ‘통 큰’ 기부를 하기도 했고, 우주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해저에서 군함 잔해를 찾기도 했다.

◇ ‘컴퓨터 소년’ 앨런

앨런은 1953년 1월 시애틀에서 태어났다. 머리가 비상했던 그는 사립 레이크사이드스쿨을 졸업하고 SAT(미국 수학능력시험)에서 만점을 받아 워싱턴주립대학에 들어갔다. 그러나 2년 후 그는 대학교를 돌연 자퇴했다. 이후 그는 보스턴에 있는 소프트웨어 업체 하니웰(Honeywell)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했다.

앨런의 학창시절에서 MS를 공동 창업한 게이츠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통합해 운영하는 레이크사이드스쿨 재학 당시 14살 때, 12살이었던 게이츠를 만났다. MS 신화의 시작이다.

레이크사이드스쿨의 어머니회는 자선 바자회를 열어 번 돈으로 컴퓨터를 구매해 학교에 기증했다. 레이크사이드스쿨은 소위 상류층 자제들이 들어가는 ‘부자 학교’였다. 그래서 당시 값도 비싸고 대중에게 생소한 기계인 컴퓨터를 학생들에게 사줄 수 있었다. 앨런과 게이츠는 곧 컴퓨터에 매료됐고 곧 ‘컴퓨터 프로그래밍 마니아’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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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앨런이 펴낸 그의 자서전 ‘아이디어 맨’ 표지. /포트폴리오


컴퓨터는 그들의 ‘연결고리’다. 컴퓨터라는 같은 관심사를 가진 둘은 금세 가까워졌다. 앨런과 게이츠의 이야기가 실린 책 ‘이노베이터’에 따르면 둘은 하루에 열두 시간이 넘도록 코딩에 몰두했다. 둘 중 누가 사흘 연속, 또는 나흘 연속 연구실 밖을 나가지 않고 코딩을 하는지 내기도 했다고 한다. 둘의 프로그래밍 실력은 날로 늘어갔다.

그들은 레이크사이드스쿨 재학 당시 프로그래밍 실력을 바탕으로 같은 학교 친구였던 폴 길버트와 함께 프로그래밍 회사 ‘트래프 오 데이터(TRAF-O-DATA)’를 차려 돈을 벌기도 했다. 이 회사는 도로 교통 기관에서 나오는 로우 데이터(미가공 자료)를 읽어 교통 흐름 보고서를 작성해주는 일을 했다. 게이츠는 워싱턴주립대 사서로 일하는 앨런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대학 컴퓨터를 이용해 프로그래밍했다.

◇ 빌 게이츠와 함께 한 ‘MS 신화’

1975년 앨런은 게이츠에게 제안했다. 개인용 컴퓨터(PC) 시대가 열릴 것 같으니 컴퓨터를 구동시킬 프로그램을 만드는 회사를 차리자는 것. 앨런의 집요한 권유에 게이츠도 하버드대를 중퇴하고 자본금 1500달러(약 170만원)로 사업에 뛰어들었다. 둘은 1:1 출자 비율로 사업을 시작했다. IT 거인 MS의 탄생이다.

앨런은 1975년 초 ‘알테어 8800’ 개발 소식을 접했다. 알테어 8800은 MITS사가 개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던 초기 PC로, ‘에니악(ENIAC)’ 등 초기 컴퓨터보다 훨씬 작고 이동이 간편해 PC 시대를 열었다. 앨런은 직감적으로 PC 프로그램을 만들면 돈을 벌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앨런은 망설이던 게이츠에게 "남들이 먼저 치고 나가기 전에 우리가 하자"고 권유했다고 한다.

앨런의 직감은 맞았다. 1980년대 IBM이 PC 기본 운영체제로 MS ‘도스(DOS)’를 채택하면서 MS는 세계 최대 컴퓨터 운영체제 회사가 됐다. 이후 MS는 차례로 운영체제 ‘윈도(Windows)’와 문서 작성 프로그램 MS ‘워드(Word)’를 내놓으면서 승승장구했다. MS는 1991년 세계 PC 점유율 90%를 넘기면서 시장을 지배했다.

앨런과 게이츠도 돈방석에 앉았다. 앨런은 미 경제 전문지 포브스가 집계한 2018년 억만장자 순위 44위에 올랐다. 그의 자산은 200억달러(약 22조원)가 넘는 것으로 전해졌다. 게이츠의 재산은 970억달러(약 109조원)으로 올해 세계 2위 부자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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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10월 19일 폴 앨런(왼쪽)과 빌 게이츠가 IBM과의 계약을 성사시키고 컴퓨터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둘은 ‘환상의 짝꿍’이었다. MS 재직 당시 앨런은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밑그림을 그리는 ‘아이디어 맨’이었고, 게이츠는 앨런의 청사진을 실행에 옮기는 ‘실현가’였다. 그는 비호지킨 림프종이 발병하면서 1983년 MS를 떠나기 전까지 MS 부사장 겸 연구개발·신제품 책임자로 일했다. 그는 2009년 림프종 완치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게이츠와 앨런의 우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앨런은 2011년 자신의 자서전 ‘아이디어 맨: 마이크로소프트 공동창업자의 회고록’에서 게이츠와 사이가 틀어진 이유를 밝혔다. 1982년 비호지킨 림프종에 걸린 앨런이 회사에서 자신의 몫을 줄이려는 게이츠와 스티브 발머 전 MS CEO의 대화를 엿들은 것이다. 게이츠와 발머는 다른 주주들에게 스톡옵션을 발행해 앨런의 지분율을 낮추자고 했다고 한다. 이는 앨런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앨런은 그런 게이츠를 "돈밖에 모르는 기회주의"라고 평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게이츠의 요구대로 지분율을 낮춰줬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둘이 계속 왕래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는 말도 있다. 게이츠는 이와 관련 "내 기억과 폴의 기억이 많이 다르다. 난 우리의 우정을 소중히 생각하며 그의 공헌에 감사한다"는 입장을 내놨다.

◇ MS 퇴사 후 ‘괴짜’ 사업가·자선가 변신

MS의 성공으로 거부가 된 앨런은 사업가이자 자선가로 이름을 날렸다. 워낙 여러 방면에 걸쳐 사업을 벌여 ‘괴짜’라는 별명도 얻었다. 그는 1986년 여동생 조디 앨런과 함께 투자회사 ‘벌컨’을 세워 기술과 미디어, 과학, 부동산 등 다양한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30대였던 1988년 NBA 포틀랜드 트레일 블레이저스를 인수해 3대 프로스포츠 사상 최연소 구단주로 이름을 올렸다. 그는 구단주가 되자 "꿈이 실현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1996년 NFL 시애틀 시호크스도 사들였다.

그는 인공지능(AI) 등 과학에도 관심을 가졌다. 2003년 뇌과학을 위한 ‘앨런뇌연구소’도 설립하고 거액을 투자했다. 또 2014년 뇌연구소의 자매 연구소인 ‘앨런 인공지능 연구소’도 열었다. 그는 기술 발전과 기술의 사회적·경제적 영향은 분리할 수 없다고 믿어, ‘공익을 위한 인공지능’ 프로젝트도 진행했다.

앨런은 2016년 시애틀에 '폴 앨런 프런티어스 그룹'을 만들고 뇌과학, 생명과학 연구에 막대한 돈을 쏟아부었다. 앨런은 반도체 혁명 이후 새로운 혁명은 생명과학 분야에서 온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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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형 항공기‘스트래토런치’의 모습(위 사진). 이 항공기는 날개 길이가 118m로 축구장보다 큰 규모를 자랑한다. 아래 사진은 발사체를 가운데에 탑재한 채 지구 상공을 비행하는 모습을 나타낸 상상도. /스트래토런치 시스템


그는 우주 산업에도 관심이 많았다. 앨런은 2004년 최초의 민간 유인우주선 ‘스페이스십1’을 쏘아 올렸다. 2017년에는 로켓 운송용으로 미식축구 경기장에 버금가는 크기를 자랑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비행기 ‘스트래토런치’를 공개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그는 시애틀에 팝(pop) 박물관을 설립했고 시애틀 레이크 유니언 부근의 낙후지역을 바이오테크 연구센터로 재개발하는 사업을 주도했다. 해저 수색팀을 이끌며 일본 전함 잔해와 2차 세계대전 때 침몰한 미국 군함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는 1986년 ‘폴 앨런 가족재단’을 만들면서 기초 과학 기부 및 사회 공헌 활동을 시작했다. 2014년 서아프리카에 에볼라 바이러스가 창궐하자, 앨런은 퇴치 프로그램에 1억900만달러(약 1230억원)를 내놓기도 했다. 이밖에도 평생 교육과 야생보호·환경·예술 등을 위해 20억달러(약 2조2500억원)가 넘는 돈을 지원했다. 그는 2010년 사후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기부할 것이라고 발표하기도 했다.

[이다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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