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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수사반장]"제 DNA가 왜 거기서…" 15년 만에 붙잡힌 '발발이'의 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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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명백백한 증거 앞에서도 우기고 보는 범죄자가 있다. 10건의 연쇄강도강간을 저지른 김민수(가명·52)의 경우다. 범행현장에서 발견된 DNA는 그의 것이었다. 그런데도 김씨는 잡아뗐다. "제 DNA가 왜 거기서 나와요? 검사 잘못 하신 거 아닙니까."

자못 당당한 태도에 광주지방경찰청 미제사건팀 수사관들마저 당황했다. 매일 4시간의 강도 높은 수사가 전개됐다. "증거가 명백하다. 실토하라"는 추궁에 김씨는 "모른다"고 한사코 버텼다. 다섯 번째 심문까지 줄다리기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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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정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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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째 심문이 있던 지난 11일 오전이었다. 수사관이 엄포를 놨다. "그래도 DNA는 바뀌지 않습니다. 계속 부인하다간 ‘괘씸죄’로 형량만 높아질 겁니다."

이 말에 범인이 비로소 무너졌다. 그에게는 과거 다른 죄로 끝까지 버티다가 법정 구속된 쓰라린 경험이 있었다. "범행 이후 줄곧 불안에 떨면서 살아왔습니다." 15년 전 광주·대전일대에서 부녀자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발발이 김민수가 범행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경찰에 따르면 광주·대전 발발이는 2003~2006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 3년간 그가 성폭행한 부녀자만 10명. 광주광역시에서 7건, 대전에서 3건이었다. 이 중에서 광주 북구에서만 6건의 범행이 집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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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는 치밀했다. 낮에는 젊은 여성이 혼자 거주하는 주택을 물색했고, 밤이 되어서야 범행에 나섰다. 몰래 침입한 다음에는 피해자의 눈부터 가렸다. 눈이 가려진 채 범행을 당한 피해자들은 달리 진술할 것이 없었다. 다만 공통적으로 "몸에서 악취가 났다"고 했다.

그의 검거를 방해한 다른 요인도 있었다. 같은 시기, 광주·대전 일대에서 연쇄적으로 성범죄를 저지른 또 다른 ‘발발이’가 존재했던 것이다. 수사에 혼선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다른 발발이들은 끝내 잡혔지만, 몽타주조차 없었던 김씨만이 수사망을 벗어났다. 현장에서 채취한 DNA만 남긴 채, 10건의 사건은 미제(未濟)가 됐다.

성폭행의 공소시효는 10년. 경찰이 파악한 그의 마지막 범죄는 2006년이다. 2016년이 지나면 김씨는 처벌을 면할 수가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특례법이 제정되면서 DNA를 확보한 특수강도강간 범죄의 공소시효가 25년으로 확 늘었다. 지난해 2월 광주지방경찰청 미제사건전담팀이 재수사를 결정했다. 사건 발생 15년 만에 반전(反轉)이 일어난 것이다.

정영삼(43) 광주청 미제사건전담팀장은 관내 7개 성폭행 범죄를 동일범 소행으로 의심했다. 실제 범행현장에서 채취한 DNA를 데이터베이스와 대조하자, 10건의 범행현장에서 발견된 것과 동일했다. 광주·대전에서 발생한 성폭행은 한 사람이 저질렀다는 얘기였다. 문제는 DNA의 주인을 찾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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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과학수사연구원 DNA분석실/조선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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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장소에서 실마리가 잡혔다. 지난 2월 전남 화순군에서 김씨가 또 다른 성범죄(강제추행)로 입건된 것이다. 그는 범행 다섯 달만인 지난 7월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몸은 풀려났지만 검찰 데이터베이스에 김씨의 DNA가 남았다.

이것이 결정적 증거로 작용했다. 경찰의 확보한 광주·대전 발발이 DNA와 일치했던 것이다. 경찰은 지난 2일 ‘유전자가 일치한다’는 대검찰청 연락을 받고, 곧장 김씨 추적에 나섰다. 15년 전 사건 범죄자를 체포하는데 걸린 시간은 나흘이었다.
경찰은 조심스럽게 15년 전 피해자들에게 "범인을 잡았다"는 소식을 알렸다. 피해자들은 모두 법정증언을 거부했다. 정 팀장 얘기다.

"‘끝내 잡아줘서 감사하다’는 분도 계시지만, 다른 분들은 ‘지금도 그 자식을 죽여버리고 싶다’ ‘그 기억은 지우고 싶다’고들 하십니다. 범인을 잡았다는 소식을 듣곤, 아무 말 없이 한참 있다 이내 끊어버리는 분도 있습니다. 지난 15년간 끔찍한 기억을 안고 산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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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김씨의 또 다른 암수범죄(暗數犯罪·수사기관이 파악하지 못한 범죄)를 쫓고 있다. 수치심에 피해사실을 신고하지 않은 추가 피해자들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정 팀장은 "범인은 DNA로 확인된 범죄 외에는 ‘기억이 안 난다’고 여전히 오리발을 내밀고 있다"면서 "공소시효가 남아 있는 한 끝까지 수사해 죗값을 받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윤민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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