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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쓱어, 냠어’…유희인가, 파괴인가? 거세지는 언어 일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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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통가 장악한 도깨비 언어, 초성어…‘섯씨구~’가 뭐야?
한글 익히기 전에 외계어부터 배울라...학부모들 걱정
‘참신하다 vs 소통 불가’ 반응 갈려

조선일보

모든 자음을 ㅅ,ㅅ,ㄱ으로 변환해 사용한 ‘쓱어’를 선보인 SSG마켓 광고./유튜브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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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 새각. 소긋!’
#냠냠냠냠 냠냠?

유명 배우와 걸그룹이 등장한 광고에 알 수 없는 대화가 오간다. 분명 한국어 같은데 무슨 말인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다. 못 알아듣는 것이 당연한 건지, 친절하게 자막도 달렸다. 첫 번째 말은 ‘헐! 대박, 소름!’, 두 번째 말은 ‘해외여행 갈까?’란다. 자막을 보면서도 어떤 규칙으로 이런 단어가 만들어진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하니 그냥 받아들이는 수밖에.

◇ 분명 한글인데…자막 없인 못 알아듣겠네

이들 광고는 젊은이들이 친밀감을 느끼기 위해 암호처럼 쓰는 ‘도깨비 언어’ 혹은 ‘비밀 언어’라는 놀이문화에서 따왔다. 앞서 2016년 SSG닷컴은 신세계의 영문 머리글자를 소리 나는 대로 '쓱'이라고 읽은 광고로 성공한 데 이어, 최근 ‘쓱어(語)’를 적용한 광고를 냈다. 모든 자음을 ㅅ,ㅅ,ㄱ으로 변환해 ‘신선한데’는 ‘식석갓세’로, ‘얼씨구’는 ‘섯씨구~’, ‘믿음이 확 가네’는 ‘싯슷기 솩~가세’로 표현했다.
광고를 본 대중의 반응은 엇갈린다. "불어나 일본어인 줄 알았는데, 언어유희더라. 발상이 참신하다"는 반응부터 "궁금증을 유발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뭘 말하려는 건지 모르겠다. 억지스럽다"는 혹평까지 다양하다. 어떤 이는 "스극스극거리는 게 귀신 소리 같아서 소름 끼친다"고 했다.

SSG닷컴의 광고를 제작한 HS애드는 "정보(information)가 아닌 인상(impression)이 중요하다는 점에 주목해 이 광고를 진행하게 됐다"면서 "한글의 과학적이고 음성학적인 원리와 조형학적 특성 덕분에 쉽게 변형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롯데면세점의 ‘냠어’도 같은 맥락이다. ‘롯데 듀티 프리(LOTTE DUTY FREE)’의 첫 글자 LDF에서 D를 아래로 내려 한글 ‘냠’으로 표기하고, 광고 속 모든 대화를 ‘냠’으로 표현했다. LF의 온라인 쇼핑몰 LF몰도 같은 방식으로 ‘냐’ 광고 시리즈를 선보여 호평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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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머리글자를 한글 ‘냠’을 표기하고 ‘냠어’를 선보인 롯데면세점 광고./유튜브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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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어유희는 현실의 반영…한글 파괴 지적도

초성어를 붙인 제품도 쏟아져 나온다. 처음엔 10~20대 소비자를 대상으로 하는 간식과 의류 등에 적용되더니, 이젠 고객 연령대가 높은 홈쇼핑 브랜드도 출시됐다. 현대H몰은 지난 15일 생활용품 PB브랜드 ‘ㄱㅊㄴ’를 론칭했다. 고객들이 쇼핑할 때 "괜찮네’라고 표현하는 것에서 자음만 따왔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유통업계 한 관계자는 "나이를 불문하고 모바일 메신저에서 ㅇ(응), ㅇㅋ(오케이), ㅊㅋ(축하) 등의 줄임말을 쓰는 것이 생활화됐다"면서 "많은 예산을 들이지 않고 소비자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는 방법으로 신조어나 줄임말을 마케팅에 활용하고 있다"고 했다.

언어유희는 현실의 반영이다.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는 "요즘 사람들은 사는 게 무료하고 희망이 없어 말초적인 자극으로 즐거움과 위안을 얻으려 한다. 그런 요구가 디지털, SNS 환경과 만나 신조어를 즐기는 문화로 퍼졌고, 상업적으로 번졌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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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현대H몰이 선보인 자사 리빙 브랜드 ‘ㄱㅊㄴ’./현대홈쇼핑


이전에 언어유희는 일부 방송인이 만들어 내는 권력이었다. 하지만 이젠 개인이 만든 신조어가 인터넷에 퍼진 후 방송이나 광고에 나와 공신력을 얻고, 다시 인터넷을 통해 대중에 확산된다. TV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10대들이 쓰는 급식체(10대 학생들이 많이 사용하는 말투)를 소재로 한 코미디가 나오고, 심지어 뉴스에서도 신조어가 남용된다.

일각에선 신조어를 지나치게 많이 쓰면 사고가 얕아지고, 소통 방법이 왜곡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초등학생 자녀를 둔 주부 김지윤 씨(41)는 "아이가 한글을 제대로 익히기 전에 외계어부터 알게 될까 걱정된다"고 했다.

자연스러운 놀이 문화로 봐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2005∼2006년 신조어 938개의 매체 출현 빈도를 추적 조사한 결과, 국립국어원에 신조어로 등록된 이듬해부터 2015년까지 총 20회 이상·5개년간 연평균 1회 이상 매체에 사용된 단어는 250개(26.6%)에 불과했다. 즉, 신조어 10개 중 7개는 10년이 지나면 소멸했다.

이건범 대표는 "언어유희를 통해 새로운 문화 자산이 생겨나기도 한다. 가령 밀당, 꿀잼, 심쿵 등은 이전엔 없던 문화 현상을 나타내는 단어"라면서 "놀이는 놀이대로 즐기돼, 일상에서는 제대로 된 언어를 쓰는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김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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