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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30년 가정폭력 아버지 살해한 ‘어느 사형수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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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사형제, 폐지할 때 됐다 ②

가정폭력 아버지 살해한 김00씨

24년째 가족걱정 등 변호사에 편지

“수인번호 불릴 때마다 죽음의 공포”

속죄의 의미로 장기기증 등 서약

무기수 감형 뒤 16년째 복역중

여러 자격증 따며 사회복귀 의지

김00씨 노모 장아무개씨

“아들이 잘못했지만 지난날 반성중

사형제 폐지 소식 빨리 들었으면”





<한겨레>는 1989년 한국사형폐지운동협의회를 만든 이상혁 변호사를 통해 사형수가 쓴 편지들을 입수했다. 1994년 3월부터 지난 7월까지 20여년 동안 이 변호사에게 날아온 63통의 편지, 200여쪽에는 죽음을 둘러싼 공포, 지은 죄에 대한 반성, 남겨진 가족에게 느끼는 미안함 등이 꾹꾹 눌러쓴 펜글씨로 남았다. 편지를 건넨 이 변호사는 “흉악범이라도 죄를 진심으로 반성하고 피해자에게 사죄할 기회를 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 변호사와 편지를 주고받은 김00 씨를 통해 사형수의 삶을 따라가봤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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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00씨는 사형수였다. 2002년 마지막날 특별사면을 받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기 전까지, 그는 1993년부터 2002년까지 10년 동안 붉은 명찰을 가슴에 달고 매일 죽을 날을 기다렸다. 1992년, 그는 아버지를 죽이고 시신을 유기한 혐의로 경찰에 붙잡혔고 이듬해 사형을 선고받았다. 27살 때의 일이다.

그의 아버지는 술을 마시면 폭력을 일삼았다. 열여덟살에 시집온 어머니는 30년 가까이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렸다. 사건이 벌어진 날에도 아버지는 취해 있었다. 술 취한 아버지가 흉기로 어머니의 머리를 찍었고 어머니는 정신을 잃었다. 이를 본 김씨는 이성을 잃었다. 엽총으로 아버지를 쏘고, 아버지의 주검을 한강에 유기했다. 존속살인 등의 혐의로 경찰에 붙잡힌 김씨는 혐의를 순순히 인정했다고 한다. 그렇게 그는 사형수로 서울구치소에 수감됐고 26년째 복역하고 있다. 20대 후반이던 그는 이제 50대다.

김씨는 구치소에서 ‘사형수’가 아니라 ‘최고수’라고 불렸다. ‘최고형을 받은 사람’이란 뜻으로 사형수와 같은 말이다. 구치소에서는 사형수라는 말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사형’이라는 단어는 공포를 극대화한다. 구치소에서는 사형수를 최고수로 부르는 게 관행이다.

물론 최고수라고 부른다고 해서 사형과 멀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형수의 수감생활은 늘 죽음과 맞닿아 있다. 그들에게 하루는 언제나 인생의 마지막날이다. 일반 재소자는 하루가 빨리 지나가길 바라지만, 사형수는 하루가 지나면 죽음에 한발짝 더 가까이 갔다고 여긴다.

63통 참회 편지 “인간쓰레기입니다…하지만 재활용이라도”

1992년 존속살해 ‘4088번 김00’
“뚜벅뚜벅 교도관 구두발 소리는
저승사자 오는 발소리 같습니다”
“시간 가면 징역사는 사람 가지만
우리는 죽음의 날 가까워집니다”


2002년 ‘모범수’ 무기징역 감형
“10년 동안 사형 집행 기다리다
은혜받아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옥중에서 자격증 8개 따며
“다시 쓰여지는 재활용 상상합니다”


편지 주고받은 사형폐지운동협
“종신형 두되 가석방 가능케 해야
희망 있기에 죄 진심으로 뉘우쳐”


김00의 노모 장씨
“아들이 잘못했지만, 지난날 반성
사형제 폐지 소식 빨리 들렸으면”


“저희 사형수들은 사실 징역을 산다고 할 수가 없지요. 덤으로 산다고나 할까요. 시간이 가면 갈수록 징역 사는 사람들은 출소할 날이 가까워지지만 우리는 죽을 날이 가까워진다고 할까요. 사형수로 지낸 지 햇수로 어느덧 6년. 스물일곱에 들어와서 서른두살이 되었읍니다.”(97년 3월17일)

매일이 덤처럼 주어진 삶이니 언제 사형집행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렇다고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형수의 삶은 불안함의 연속이다. 그들은 작은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한다. 교도관의 발소리, 수인번호(수번)를 부르는 소리가 행여 집행장으로 이끄는 신호일까 봐 그들은 늘 마음을 졸인다.

2009년 김씨가 감방에서 사형수 시절을 떠올리며 쓴 글은 사형수가 느끼는 매일의 불안감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글 제목은 ‘어느 찬 옥방에서 사형제도가 자살하길 고대하며’이다. “뚜벅뚜벅 복도를 울리며 다가오는 교도관의 구두발 소리, 그 소리는 마치 시한폭탄의 초침 소리 같았고 저승사자가 다가오는 발소리 같았다. 행여 면회나 교회, 의무과 연출 등으로 수번을 부를 때면 등허리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간담이 서늘하게 녹아내려 하루에도 몇번씩 죽음의 공포와 마주치곤 했다.”(09년 12월3일)

그에게도 죽음의 문턱 앞에 선 듯 눈에 선한 순간이 있었다. 복역 햇수로 6년째 되던 해인 1997년 12월30일, 그날 아침 김씨는 그 어느 때보다 일찍 눈을 떴다. “인간은 영적인 동물이기에 직감이 왔다.” 그는 유독 서늘한 마음으로 아침을 맞았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눈을 뜬 순간부터 ‘오늘이구나’라고 직감한 김씨는 이른 아침 찬물로 목욕을 했다고 한다. 쨍하게 맑아진 머리로 유서를 쓰고 조용히 기도를 올렸다. 기도하며 기다리길 얼마쯤, 교도관이 그의 수번을 불렀다. “4088 김00, 면회.”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같은 방 ‘형제’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넨 그는 성경책을 손에 든 채 문밖을 나섰다. 복도를 걸어가며 보이는 사람들에게도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교도관은 그를 사형장 쪽이 아닌 접견장 쪽으로 안내했다. 접견장에는 당시 서울구치소 담임목사였던 문장식 목사가 서 있었다. 문 목사의 충혈된 눈을 보고서야 ‘나 아닌 누군가의 집행이 이뤄졌구나’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날 김영삼 정부는 ‘지존파’ 조직원 6명을 포함해 사형수 23명의 형을 집행했다. 한국에서 사형이 집행된 마지막날이다. 그와 가깝게 지낸 ‘최고수 형제’ 가운데 한명도 그날 세상을 떠났다. 그와 함께 기독교 세례를 받은 이였다. 최고수 형제는 떠나면서 장기와 시신을 기증했다.

사형수들은 죽음이 오기 전 장기기증을 서약하는 경우가 많다. 바깥에서 죄를 짓고 이곳에 들어왔지만, 떠날 땐 누군가의 목숨을 살리겠다는 뜻이다. 김씨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사형을 선고받고 2년이 지난 뒤인 1995년 장기기증과 시신을 의대 실험용으로 기증하겠다는 서약서를 썼다. ‘어떻게 하면 무의미하지 않게 죽을까’를 생각하다 내린 결론이었다. 장기를 기증하고, 의대에서 시신을 해부하고 난 뒤에는 자신을 화장해 아버지 무덤 위에 뿌려달라고 했다.

“필요한 장기와 몸은 기증하고 나머지는 화장해 저로 인해 비명에 돌아가신 아버님 무덤 잔듸에 거름이라도 되게 뿌려주십시오. 악한 사탄 마귀의 종이 되어 어머니를 구타하고 학대한다는 이유로 나를 낳아주신 아버지를 살해한 전대미문의 패륜아가 돌아가신 아버님께 조금이라도 속죄하고 또 남은 가족들에게도 속죄하는 뜻으로 쓸 수 있는 것은 쓰고 나머지는 아버님의 무덤 위에 잔듸 거름이라도 되고 싶읍니다.”(95년 3월27일)

장기기증은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최소한의 속죄였다. 기증이나 기부 등은 이미 습관이 된 속죄의 한 방법이다. 김씨는 매년 영치금을 100만원쯤 모아 결식아동 구호단체 등에 기부한다. 가족이 없는 재소자에게 자신의 영치금을 쪼개 필요한 물건을 사서 건네기도 한다. 그는 “이곳에서라도 남을 도울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고마운지 모른다”(2000년 8월25일)고 적었다.

사형수 가운데에는 구치소에서 죄를 뉘우치는 일이 종종 있다. 수감생활을 하며 종교에 의지하게 되거나 교정위원, 자원봉사자 등과 대화를 나누면서 바깥에서 자신이 얼마나 참혹한 범죄를 저질렀는지 깨닫는 경우다.

1987년 강도살인 혐의로 사형 확정판결을 받은 서채택씨도 그런 사례다. 교도소에서 불교를 믿게 된 그는 죄를 진심으로 뉘우쳤고, 서씨 때문에 목숨을 잃은 피해자의 아내는 ‘사형시키기보다 무기수로 속죄의 삶을 살게 해달라’는 탄원서를 냈다. 하지만 서씨는 1994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유가족에게 죄송하다. 저를 마지막으로 두번 다시 사형집행이 없었으면 한다”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다. 그 역시 몸을 기증하고 떠났다.

매일 엄습하는 죽음의 공포 탓에 일부 사형수는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2015년 서울구치소에선 친척 5명을 살해해 사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이아무개씨가 목을 맨 상태로 발견돼 이틀 만에 숨진 일이 있었다.

2009년 사형수 정아무개씨도 수감 중이던 서울구치소 독방에서 목을 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사형집행에 두려움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쓰던 공책에는 “현재 사형을 폐지할 생각은 없다고 한다, 요즘 사형제도 문제가 다시…, 덧없이 왔다가 떠나는 인생은 구름 같은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법무부는 당시 조두순 사건을 계기로 사형집행 여론이 들끓자 그로 인한 불안감으로 정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 같다는 추정을 내놓기도 했다.

이런 소식을 접한 김00씨는 당시 이 변호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10년 세월을 사형수로 지내며 언제 닥칠지 모르는 집행의 공포 속에서 마음을 졸여봤기에 그의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됐다”고 했다. 그는 “소식을 접한 수용자 중에는 ‘매일 죽음의 공포 속에서 피가 마르느니 깨끗하게 자살을 택한 것이 잘한 일’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더러 있다”고 썼다. 그는 “종교가 없었더라면 나 또한 무슨 일이 났어도 났을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30년 넘게 사형제 폐지에 몰두한 이상혁 변호사는 “그동안 70~80명의 사형수를 만나봤는데 대부분 교화의 가능성을 보였다”며 “사형수가 개과천선하고 피해자 가족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빌어 용서를 받는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김씨는 모범적인 수형생활로 2002년 무기징역으로 감형을 받았다. 사형수 시절 그는 “지은 죄를 생각하니 엉뚱한 (생의) 미련을 가진 것 같아 깜짝 놀랐다” “사후 영원한 삶을 살겠다”(94년 3월8일) 등 목숨을 체념한 듯한 태도를 보인 적도 있다. 하지만 2002년 감형된 뒤 그는 “10년 동안 가슴에 빨간 수번을 달고 집행 날만 기다리다 하나님의 은혜로 새 생명을 얻었다”며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했다. 옥중에서 자동차정비사, 보일러기능사, 온수온돌자격증 등 8개의 자격증을 딴 그는 만약 다시 사회로 나갈 수 있게 된다면 새 삶을 살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살을 에는 듯한 한기를 피하기 위해 침낭 속에 들어갈 때마다 상상한 것이 있었는데, 이곳 교도소는 인간쓰레기 하치장이고 나는 쓰레기봉투에 들어 있는 쓰레기가 아닐까 하는 거였습니다. 하지만 쓰레기도 완전히 못 써 매립시키거나 소각시키는 것이 있고 다시 녹여 재활용하는 쓰레기가 있듯이 나도 지난날의 추하고 더러운 죄악을 용광로에 녹여 조금은 볼품없는 모습이더라도 다시 쓰여지는 재활용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곤 합니다.”(06년 4월21일)

그는 사회로 다시 나가는 것과 함께 사형제 폐지를 꿈꾼다. 더는 사형수가 아니지만 자신을 “영원한 사형수”라고 생각하는 김씨는 사형제가 폐지되어 사형수들에게도 죄를 반성하고 피해자에게 사죄할 기회가 주어지길 원하고 있다. 김씨의 편지 곳곳에는 사형제 폐지에 대한 기대가 묻어났다.

“법무부에서 사형법을 재검토한다는 반갑고 기쁜 소식이 있었읍니다. 그 오랜 세월 애써오신 정성의 결실이 조금씩 맺혀지는 듯하여 너무 기쁘며 완전히 이루어질 때까지 불미스러운 악재가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빌며 조심히 기다립니다. (중략) 저희 같은 당사자들은 유구무언일 수밖에 없읍니다. 그저 여론과 정부의 처분만 기다릴밖에요.”(06년 4월1일)

신문을 보며 사형제와 관련한 기사를 스크랩해둔다는 김씨는 올해 편지에도 사형제 폐지에 기대감을 드러냈다. “얼마 전 신문에 올해 안에 대통령이 사형집행 모라토리엄(중지)을 추진한다는 기사를 보고 드디어 바람과 기도가 이루어지는구나 했습니다.”(18년 7월3일)

사형수들과 수십년째 편지를 주고받는 이상혁 변호사는 “사형수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사실 사형보다는 종신형”이라며 “사형제를 폐지하고 그 대안으로 상대적 종신형을 두되, 매우 엄격한 기준에 따라 가석방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아무리 바늘구멍만한 기회라고 하더라도 희망이 있기 때문에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게 된다. 흉악범이라고 교화의 기회도 주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했다.

아들의 범행으로 남편을 잃은 김씨의 어머니 장아무개(71)씨는 아들이 집에 돌아올 수 있기를 눈물로 탄원했다. 장씨는 “아들이 잘못했던 건 맞지만, 지난날을 반성하며 구치소에서 착실하게 생활하고 어려운 사람들도 돕고 있다. 꼭 좋은 소식이 있었으면 좋겠다”며 울먹였다. 26년째 아들의 옥바라지를 해온 장씨도 이제 일흔이 넘었다. 장씨는 자신을 지키느라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맏아들과 여생을 보내려고 작은 집을 마련했고, 그곳에서 지금 홀로 산다. 신민정 기자 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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