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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실직 도시’ 군산의 한숨…“재취업 시장 45살만 넘어도 환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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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제조업 고용 위기’ 군산을 가다

“정부 알선으로 취업한 사람 드물어…자영업 진출도 엄두 못내”

“재취업 교육만 받다 끝날까봐 두려워”-“실업급여 끊기면 막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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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조업 생산직으로 20년 이상 잔뼈가 굵었기 때문에, 이 회사를 나가더라도 어디든 일자리는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난 5월말 한국지엠(GM) 군산공장이 문을 닫는 과정에서 희망퇴직한 실직자 세 사람이 지난 12일 전북 군산 시내의 한 식당에 모여 앉았다. 일터를 떠난 지 다섯달 정도 된 강병우(가명·48), 한철민(가명·53), 박철수(가명·54)씨는 “새 일자리를 구하는 게 이렇게 어려울 줄은 몰랐다”고 입을 모았다. 이들은 완연히 ‘중년’으로 접어든 나이, ‘제조업’에만 종사한 수십년 경력, ‘군산’에 정착한 시간 등 삶의 궤적이 재취업 앞에 놓인 장애물이라는 사실을 구직시장에 뛰어들고 나서야 깨닫게 됐다고 했다. 올해 정부는 전북 군산을 고용·산업위기지역으로 지정하고 각종 지원에 나섰지만, 정작 이들이 원하는 일자리를 주진 못했다.

군산은 최근 지속되는 고용부진 현장의 최전선이나 다름없다. 지난 2월부터 전년 동월비 취업자 수 증가분이 급락하는 등 고용사정이 안 좋아졌는데, 구조조정을 겪는 제조업의 40~50대 노동자들이 가장 큰 타격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원자료를 분석해보면, 제조업의 45~54살 취업자 수는 지난 4~8월에 한해 전보다 월평균 8만1천명씩 감소했다. 35~44살 연령대에서 같은 기간 적게나마(3400명) 취업자 수를 늘린 것과 대조된다.

희망퇴직 이후 난생처음 고용지원센터를 찾아 구직 원서를 써봤다고 철민씨는 말했다. 1987년 대우자동차 부평공장에 입사한 뒤 31년 만의 취업 준비였다. “취업 준비를 하다 보니 고용시장에선 45살만 넘어도 환갑이 지난 나이라는 걸 알게 됐다. 면접을 보러 오라고 불러주는 데를 찾기가 힘들더라.” 철수씨도 ‘중장년’이라는 단어만 보고, 전주에서 열린 중장년 취업박람회를 방문했다가 당혹스러웠던 경험을 털어놨다. 그는 “중장년이면 저 정도 나이대인 줄만 알았는데 막상 가보니 (지원 분야였던) 자재관리 쪽은 40대 초반만 찾고 있어 주눅이 들었다”고 말했다. 병우씨의 사정도 엇비슷했다. 그는 “노후 준비도 더 해놔야 하고 아직 자녀 학자금도 벌어야 하는데, 기업 입장에서는 대기업 정규직에 관리자로까지 일했던 우리 경력을 외려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더라”고 전했다.

과거에 견줘보면 회사를 퇴직하고 나서 자영업에 뛰어드는 경우도 줄어든 것 같다고 이들은 말했다. 제조업 부진은 내수 부진으로도 이어지기 때문에 도소매와 음식점 등을 주로 하는 자영업종에 끼치는 파장도 적지 않다. 병우씨는 “예전 같으면 회사에서 받은 위로금으로 편의점 차리는 사람도 있었을 텐데 현대중공업과 지엠이 나가면서 군산 경기 전반이 침체된 탓에 다들 엄두를 못 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제조업 위축은 파견 인력 축소 탓에 ‘사업시설관리·사업지원 및 임대서비스업’ 고용감소에도, 물류산업 위축으로 인해 ‘운수 및 창고업’ 고용감소에도 영향을 끼친다. 민간 서비스 업종 전반에까지 이르는 폭넓은 파급효과는 정부와 전문가들이 제조업 고용감소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배경이기도 하다.

최근 세 사람이 가장 자주 만나고 의지하는 이들은 고용지원센터 직원들이다. 주로 상담을 받고 자격증을 따기 위한 교육훈련을 받는다. 이날 철수씨는 ‘위험물 안전 관리’ 자격증을 하나 더 취득했다. “우리 몰래 가서 자격증을 하나 더 따왔다”며 장난스레 철수씨를 놀리던 철민씨도 “실직한 뒤 지게차 운전 기능사와 요양보호관리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하지만 막상 자격증을 받아보니 제조업에 재취업해야 하는데 이걸 어디에 쓰려고 땄나 싶어 헛웃음이 나오더라”고 했다.

정부는 앞서 ‘지역경제 회복을 위한 지원대책’을 통해 군산 등 고용위기지역에 대한 긴급대책을 마련했다. 실직자를 위해서는 숙련도에 따라 직업훈련을 제공하고 최대 2년간 훈련연장급여를 지원하는 등의 내용이 담겼다. 직업훈련이나 실직기간 급여 지원에 비해 고용 알선 부분은 크게 강조되지 않았다. 철수씨는 “주변에서 정부 알선을 받아 취업이 됐다는 사람이 몇십명만 돼도 희망을 가지겠는데, 취업으로 바로 연결되는 고용 알선은 찾아보기가 어렵고 모두가 교육만 받으러 다니는 문화가 우리 사이에 자연스럽게 생겨버렸다. 교육생인 채로 구직 과정이 멈춰버릴까봐 걱정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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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지원센터 직원들도 난색을 보였다. 송용칠 군산고용복지플러스센터 취업지원팀장은 “군산 안에는 이분들이 갈 만한 일자리가 거의 없어 수원의 반도체 하청업체나 목포의 조선 하청업체 등으로 재취업 알선을 시도하고 있지만 쉽지가 않다”며 “그곳에서도 젊은층을 선호하는데다 대체로 연봉 2천만원 안팎의 일자리가 많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일자리 미스매치’가 구직자의 눈높이뿐만 아니라 지역과 연령, 임금 등에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얘기다.

같은 날 정오 무렵, 군산 오식도동 국가산업단지 일대는 적막감이 감돌았다. 하청 부품업체 직원들이 살던 원룸촌에는 누군가 급히 이사를 떠난 듯 이불 등 세간을 버리고 간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인적 없는 거리를 유리문 너머로 바라보던 한 편의점주는 “매출이 갈수록 줄고 있다. 손해가 막심하지만, 프랜차이즈 본사와의 계약기간 5년을 채우려면 1년을 더 버텨야 한다”며 한숨을 쉬었다.

지엠·현대중공업 하청업체와 비정규직들은 정책자금 지원이나 사회안전망에 기대고 있지만 정부 지원이 끝나는 순간 버틸 체력이 남아 있지 않다. 올해 들어 군산 사업장의 직원 50명 가운데 31명을 내보냈다는 이곳 산단의 한 자동차 부품업체 대표는 “올해 초 공장 파산신청을 알아보던 차에 정부에서 원리금 상환을 1년 유예해줘 버티고는 있지만 내년에 이 지원이 끊기면 다시 변호사를 찾아 파산을 상담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지엠 군산공장에서 사내하도급 형태로 일했던 비정규직 고중호(가명·48)씨는 “비정규직들은 3월말 퇴사를 해서 원래대로라면 이달이나 다음달 실업급여 수급이 끝난다”며 “위로금 1천만원을 받고 나온 것이 전부인데다 새 직장도 구하지 못해 실업급여가 끊기면 당장 생계가 막막해진다”고 말했다.

국가산단 오른쪽 끝에 있는 지엠공장에는 차 한두대가 드물게 오갈 뿐 사람 흔적을 찾기 어려워졌다. 이날 밤 세 사람이 모인 식당에 뒤늦게 합류한 전석현(가명·53)씨의 요즘 별명은 ‘산 사람’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퇴직서를 내지 않고 회사에 살아남았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최근 근무지를 옮겨 이전에 해본 적이 없는 정비 분야 일을 맡고 있다. 그는 “회사에는 남았지만 새로운 환경에 적응이 안 되고 계속 버텨낼 자신도 없다”는 하소연을 연신 쏟아냈다.

군산/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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