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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인도와 비긴 중국 축구, 알쏭달쏭한 저성장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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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티비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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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지난주 시작해 오는 17일 오전 멕시코와 칠레 경기까지 이어지는 10월 FIFA(국제축구연맹) A매치 주간에 전 세계에서 펼쳐지고 있는 여러 경기 가운데 지난 13일 득점 없이 비긴 중국-인도전이 축구 팬들 사이에 화제다.

이 경기가 열리기 전 마르첼로 리피 감독은 “(중국은) 아시아의 어떤 팀이라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며 선수들을 독려했다. 이 코멘트에는 “우리의 동기부여가 충분하다면”이라는 전제가 달려 있었다. 선수들 정신력을 강조한 것이다.

그런데 경기 결과는 0-0이었다. FIFA 랭킹이 특정 나라(또는 협회) 경기력을 완벽하게 반영하지는 못하지만 중국(76위)으로서는 한 수 아래로 본 인도(97위)와 비긴 게 뼈아플 것이다. 내년 1월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아시안컵에서 좋은 성적을 기대하며 마련한 평가전 시리즈 출발 경기였기에 실망감이 무척 컸을 듯하다.

'시나스포츠'가 리피 감독의 인도전 출사표를 "중국은 누구를 이길 수 있느냐"라고 비틀어 보도한 데에서 중국 축구에 대한 자국 언론의 시각을 알 수 있다.

12일 한국(55위)은 우루과이(5위)를 2-1, 일본(54위)은 파나마(70위)를 3-0으로 물리쳤다. 중국 언론이나 팬들은 은근히 이 경기 결과를 신경 쓰고 있었을 것이다. 직접 비교할 상대가 아닌데도.

이쯤에서 축구 팬이 아니더라도 많은 이들이 궁금해 할 것이다. 1974년 테헤란 아시아경기대회와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각각 아시아와 세계 스포츠 무대에 데뷔한 이후 초고속 성장 끝에 미국과 겨루는 세계적인 강호로 성장한 중국이 왜 축구 종목에서는 빌빌대고 있는지.

사정이 이렇다 보니 15일 자 스포티비뉴스 이종현 기자가 쓴 기사 같은, 일종의 해프닝 같은 상황까지 나오게 됐다.

“中 축구, 시즌 중 U-25 군사훈련 진행…코치도 삭발+축구 훈련 전무” 제하 기사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다.

“중국 언론 '티탄 스포츠'는 14일 SNS에 "중국 U-25 대표 팀이 타이안시에서 군사훈련 입소식을 진행했다"면서 "선수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코치도 삭발했다"고 보도했다. 이 언론은 이어 "이 군사훈련은 15일부터 수 주간 진행되는데, 축구 훈련은 없다"고 설명했다.

앞서 중국 언론 '시나 스포츠'는 9일 "(군사훈련이) 승리하는 것에 좋은 영향을 줄 것"이라며 "다음 월드컵에 나설 수 있는 1993년 이후 태어난 어린 선수들을 차출했다"고 보도했다.

문제는 중국 슈퍼 리그(CSL)가 한창 시즌 중인 점이다. CSL에 소속된 선수들도 차출돼 구단에 피해가 가는 상황이며, 근본적으로 군사훈련이 축구 성적에 도움이 될지가 의문이다.“

야구 팬들이 1980년대 프로 야구 선수들이 극기 훈련을 한다면서 오대산에서 얼음을 깨고 냉수욕을 했던 장면을 떠올릴 만한 일이다.

시간을 좀 거슬러 올라가면 중국 축구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 수도 있다.

1950~60년대 한국 축구에 난적은 이란이 아니고 자유중국(오늘날 대만)이었다. 한국은 1954년 제2회 아시아경기대회(마닐라)와 1958년 제3회 아시아경기대회(도쿄) 축구 결승에서 자유중국에 잇따라 2-5, 2-3으로 져 금메달을 차지하지 못했다. 1960년대 중반까지 자유중국과 상대 전적은 5승1무6패로 한국이 열세였다.

이 무렵 중국은 1949년 새로운 체제의 나라,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뒤였고 한국과 수교하기 훨씬 전이어서 축구 교류는 대만과 경기를 참고할 수 밖에 없다. 홍콩도 간접 비교 대상이 될 수 있긴 하다. 한국은 1950년대에는 홍콩과 2승3무2패로 팽팽했다.

중국은 국가 건설 시기 이후인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는 문화대혁명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축구를 비롯한 스포츠 진흥에 신경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이때에도 종목별로 국제 대회에 나서기는 했다. 탁구가 대표적이다. 탁구는 1961년 제26회 세계선수권대회를 베이징에서 열기도 했고 1971년 나고야에서 열린 제31회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7개 세부 종목 가운데 4개 종목에서 우승했다. 이 대회를 계기로 ‘핑퐁 외교’가 펼쳐져 미·중 수교에 물꼬를 텄다.

이 시기에 축구도 국제 교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중국은 1958년 스웨덴 월드컵 아시아-아프리카 예선 1조에서 인도네시아와 겨뤄 1승 1패(베이징 4-3 자카르타 0-2)를 거둔 뒤 제3 지역인 버마 랑군(오늘날 미얀마 양곤)에서 다시 싸웠으나 0-0으로 비긴 뒤 1, 2차전 골 득실 차에서 밀려 탈락했다. 이 경기에 뛴 장훙건은 뒷날 중국 프로 축구 다롄 완다와 청두 블레이즈 감독으로 활동했다.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이후 중국은 본격적으로 국제 스포츠 무대에 나섰고 축구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은 1976년 이란에서 열린 제6회 대회(이란)에 첫 출전한 이후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아시안컵)에서 준우승 2차례와 3위 2차례, 4강 2차례 등 괜찮은 성적을 올렸다. 1984년 대회(싱가포르)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에 0-2로 져 준우승했는데 한국은 2무2패로 조별 리그 A조 꼴찌로 탈락했다.

2004년 자국에서 열린 대회에서는 결승전에서 일본에 1-3으로 져 또다시 우승에 실패했다. 샤오지아이(1860 뮌헨) 순지하이(맨체스터 시티) 하오하이둥 등은 국내 팬들 귀에 꽤 익숙하다.

단체 구기 종목의 경우 여자 배구가 세계 정상의 경기력을 꾸준히 유지하고 남자 농구는 아시아 나라로는 거의 유일하게 세계 무대에 도전할 만한 수준이라고 보면 중국 축구의 약세는 쉽게 설명이 되지 않는다.

다만 리피 감독도 전제했듯이 ‘멘탈’이 중국 축구 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추정을 해 본다. 이 같은 추정에 약간의 근거가 있다.

‘충칭의 별’로 불린 이장수 감독은 중국에 진출했을 때 가장 어려운 점으로 선수단 통제를 들었다. 프로 선수라며 너도나도 우쭐거리고 훈련 시간 준수 등 기본적인 선수단 규율을 어기기 일쑤인 선수들을 어떻게 휘어잡아야 할지가 크나큰 숙제였다고 글쓴이에게 말한 적이 있다. 어떻게 ‘군기’를 잡았는지는 밝히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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